30년간 연기하고 있지만 이병헌은 “이제 막 데뷔 1년차에 접어든 기분”이라고 했다. 30년이라는 시간을 곱씹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인다. “연기한 지 1년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임하고 있다”는 게 그의 속내다. 함께 작업한 동료 배우들은 현장에서 누구보다 철저하게 준비하는 그의 연기 스타일에 혀를 내두른다. 최근 영화 ‘백두산’을 함께한 하정우는 그런 이병헌을 두고 “열정까지도 계산된 것 같은, 연기 기계”라고 표현했다(관련기사 [인터뷰] ‘백두산’ 하정우 “수지와 부부 연기? 매순간 어색했죠”).
최근 영화 ‘백두산’을 함께한 하정우는 이병헌을 두고 “열정까지도 계산된 것 같은, 연기 기계”라고 표현했다. 사진=영화 ‘백두산’ 홍보 스틸 컷
#1990년대 드라마 다변화 주도, 한류 일등공신
이병헌은 한양대 불문과 재학 중 공채탤런트에 응시해 연기자가 됐다. 데뷔한 지 불과 1년 만에 드라마 ‘해뜰날’의 주연으로 발탁돼 1992년 KBS 연기대상 신인상을 받았고 다음해 우수상까지 받았다. 이례적인 급성장. 마침 제작 규모를 키우고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는 드라마 환경에 힘입어 이병헌도 경쟁력을 높였다. 1995년 당시로서는 과감한 도전이던 미국 로케이션 대작 SBS ‘아스팔트의 사나이’를 통해 안방극장에 블록버스터의 시대를 열었고, 1998년 첩보 장르인 SBS ‘백야 3.98’의 주인공 역시 이병헌이다.
이병헌이 30주년을 맞은 지금까지도 ‘스타파워’를 과시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은 일본을 포함해 아시아에서 시작된 ‘한류’로부터 나온다. 2000년대 초반 드라마로 촉발된 한류를 논할 때 ‘뵨사마’(이병헌의 일본 애칭)를 빼놓기 어렵다. 2002년 배용준의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대박’ 흥행을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류 열풍은 이듬해 이병헌이 주연한 ‘올인’으로 옮겨 붙었다.
단숨에 여성 팬들을 사로잡은 그는 ‘욘사마’ 배용준과 더불어 한류 투톱에 올랐다. 2006년 일본 도쿄돔에서 단독 팬미팅을 열어 4만 관객을 동원하는 저력도 보였다. 이런 활약은 2009년 제작비 200억 원의 첩보액션 대작인 KBS ‘아이리스’로 이어졌고, 일본을 포함해 아시아 7개국에도 판매되는 힘도 증명했다.
물론 30년 연예계 활동에서 우여곡절이 없던 건 아니다. 작품으로는 늘 승승장구한 이병헌이지만 몇 차례 연예계를 뒤흔든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위기설이 나돌았지만 작품과 연기로 우려를 잠재웠다. 스캔들을 딛고 내놓은 작품에서 오히려 더 활약하는 모습도 보였다. 2015년 영화 ‘내부자들’이 대표적이다.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의 한국영화로는 최고 흥행 기록(900만 명)까지 수립했다.
당시 이병헌은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만든 논란이 영화에 피해를 줄까봐 걱정”이라면서 “주어진 임무에 충실한 것이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내부자들’에 이어 1월 22일 개봉하는 이병헌 주연의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연출한 우민호 감독은 “프로 중에 프로, 한국이 놓치면 안 되는 배우”라고 평했다. 2012년 1200만 흥행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추창민 감독도 이병헌을 두고 “두뇌가 명석함과 동시에 성실함까지 갖췄다”고 칭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연출한 우민호 감독은 “프로 중에 프로, 한국이 놓치면 안 되는 배우”라고 평했다. 사진=영화 ‘남산의 부장들’ 홍보 스틸 컷
안주하지 않고 넓은 세상으로 향한 선택은 이병헌이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이다. 2009년 영화 ‘지.아이.조’로 할리우드에 진출해 2013년 2편을 거쳐 2016년 ‘매그니피센트7’의 주연으로 발돋움했다. 할리우드 안착을 위한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2012년 ‘레드2’ 개봉 당시 이병헌은 “내가 알려지지 않은 곳(미국)에서 원하는 역할을 맡으려는 건 욕심”이라며 “악역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진짜 원하는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밝혔다.
이병헌은 할리우드로 진출한 한국 배우들 가운데 영화 주연까지 맡는 유일한 연기자로 꼽힌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상의 작품상, 감독상 후보에 진출하는 등 한국 영화에 대한 할리우드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에서 그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을 배우로도 이병헌이 거론된다. 영어에 능통한 배우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할리우드 제작진의 입장에서 이병헌이 갖춘 언어 구사력, 이에 더해 파라마운트픽처스 같은 대형 스튜디오와 작업한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경력이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북미에서 개봉한 2019년 10월 마침 미국에 머물고 있던 터라 현지에서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를 만났다는 이병헌은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갖는 ‘기생충’에 대한 평가는 깜짝 놀랄 만큼 대단했다”며 “한국 영화인으로서 뿌듯하고, 여러 기록을 깨는 과정에 또 다른 기회를 열어 줄 것 같다”는 희망을 밝히기도 했다.
이병헌은 올해 시간을 쪼개 여러 작품을 소화한다. 30주년을 기념한 이벤트를 따로 벌이는 것보다 연기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명불허전의 연기력을 과시하면서 1979년 10·26 사태를 그린 새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내놓자마자 송강호와 항공 재난영화 ‘비상선언’ 촬영을 시작한다. 하반기에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히어’ 촬영도 계획하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함께한 박찬욱 감독과도 새 영화 작업을 논의 중이다. 소속사 BH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30주년과 관련한 행사를 기획하기 어려울 만큼 올해 작품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있다”며 “연기에 집중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