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남산의 부장들’을 찍기 전에 곽상천 같은 캐릭터를 현실에서 봤으면 그런 사람하곤 말도 안 섞었을 거예요. 그냥 ‘어휴, 미친 놈’ 그랬겠죠.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곽상천의 임무를 이해하려 애쓰다 보니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지금은 저런 사람을 만난다면 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화 정도는 이제 할 수 있겠죠(웃음).”
배우 이희준. 사진=쇼박스 제공
지난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희준은 한결 가벼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스크린에서 본 것과 달리 살이 쪽 빠진 것도 있었지만, 그가 1년여간 뒤집어쓰고 있었던 ‘신체적 가면’에서 벗어난 덕이 커 보였다. 25kg의 살을 찌우는 데만 3개월, 유지하는 데만 8개월을 보냈다는 그는 그 기간 동안 완벽한 ‘곽상천’이었다.
오는 1월 22일 개봉하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건 전 40일간의 뒷이야기를 다루는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한다. 권력의 중심에 선 박통(이성민 분)과 그를 암살하기에 이르는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 분), 미국에 대한민국 정부의 부정을 폭로한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 분) 등 이미 확고하게 정점을 찍은 ‘연기 괴물’들이 연기하는 인간 군상 사이, 이희준이 맡은 경호실장 곽상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극중에서 곽상천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먼저 생각했어요. 이 영화는 40일이라는 시간을 다루는데, 그 속에 캐릭터들의 행동은 다 나와 있지만 왜 그런 행동에 이르렀는지 (전사가) 나와 있지는 않잖아요. 그렇다 보니 그들의 행동에 확신을 주기 위해서 이 캐릭터의 삶, 이전의 기억들을 많이 상상하면서 연기했어요. 원작을 읽어 봤냐고 하시면… 원작 두께가 베개만 한데(웃음). 제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등장하는 부분을 표시해 두고 그 부분만 봤어요. 그리고 다양한 역사 자료를 찾아보면서 여러 입장을 살펴보기도 했고요.”
배우 이희준. 사진=쇼박스 제공
“대본을 보니까 제 대사는 다 윽박지르는 거더라고요, 읊조리거나 하는 건 하나도 없고(웃음). 이병헌 선배님과 대적하는 신은 애드리브가 하나도 없었어요. 시나리오에 보면 제 대사에 ‘X, X, X, X, X새끼’ 이런 식으로 돼 있는 게 있는데 그것도 한 글자도 안 빼고 그대로 한 거예요. 서로 그걸 약속하거나 한 건 아닌데 애드리브를 할 경우에 캐릭터가 왜곡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다들 그렇게 집중했어요.”
18년 동안 집권한 대통령을 지키는 경호실장 역으로 이희준은 몸무게 25kg를 증량하는 결단을 내렸다. “통나무처럼 우직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이야기다. 3개월 만에 100kg에 이른 체중은 “당뇨가 올 수 있다”는 의사의 조언을 받고 또 3개월 만에 감량에 성공했다고.
“인생 첫 100kg죠(웃음). 땅콩버터 잔뜩 바른 토스트를 엄청 먹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심리적으론 두렵더라고요. 배우 10년 넘게 하면서 ‘배는 안 나오게 하자’는 생각으로 조절해 왔는데 갑자기 배가 이만큼 부른다고 생각하니까…. 한편으로는 이게 저한테는 재밌는 경험이기도 했어요. 제가 ‘남산의 부장들’ 첫 촬영 할 때 정장을 입고 걸어가는데 살이 쪄서 허벅지가 안 붙는 거예요(웃음). 걸음걸이는 이상해지고, 목소리 톤도 엄청 낮아지고, 뛰려고 하는데 뒤뚱뒤뚱 뛰고…. 그렇게 되니까 순간 ‘와, 되게 재밌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전의 캐릭터는 ‘심리적 가면’에 집중하려고 애썼다면 곽상천은 재밌는 ‘신체적 가면’을 쓴 느낌이었거든요.”
신체적 가면을 쓴 이희준의 연기는 다른 배우들과 결을 달리한다. 턱 근육의 아주 미묘한 떨림이나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만으로 백 마디 대사를 전달하는 이병헌, 이성민과 다르게 이희준은 동작도 목소리도 크고 두껍다. 그 차이점이 영화 속 곽상천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배우 이희준. 사진=쇼박스 제공
조연이지만 무시 못할 존재감을 드러낸 ‘전두혁’ 역의 서현우에 대한 칭찬도 이어졌다. 이희준이 학교 후배라고 소개한 그는 이번에 이희준과 처음 작품을 같이 했다고 했다.
“영화 보시면 그 친구가 대사가 없어요. (전두환 전 대통령을 흉내낸) ‘예….’ 이거밖에 없는데,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 보면 정말 섬뜩하게 연기를 잘하더라고요. 그게 그냥 ‘욕망 있는 눈초리로 봐야지’ 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애썼구나, 정말 잘한다 싶었어요. 그리고 그 친구가 그 역할을 하면서 면도기로 머리를 계속 밀고 있었거든요. 제가 25kg 증량한 것보다 그게 더 힘들었을 거예요. 그러고 살아야 되잖아요(웃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1987’ ‘마약왕’에서도 톱스타들에 결코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왔던 이희준은 이번 작품에서 한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압도적이지는 않더라도, ‘이희준의 재발견’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그렇다면 ‘남산의 부장들’은 이희준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았을까.
“영화 보고 나서 든 생각이요? ‘선배님들 다 빨아먹고 싶다!’ 그런데 소화가 안 되겠죠(웃음)? 배우 이희준만의 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는데, 제가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감탄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곽도원 선배님의 확 들어오면서 톡톡 튀는 연기라든지, 이성민 선배님이 보여주신 그 40일 동안의 생생한 변화, 이병헌 선배님의 클로즈업 속 디테일 연기…. 영화에 대한 평가는 예상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저도 캐릭터에 가슴을 던져서 이해를 하며 연기했거든요. 그렇게 연기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는 게 또 이번 영화로 제가 얻은 큰 소득이었던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