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병헌이 이번에는 남한의 역사적 인물 연기에 도전했다. 사진=BH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 연말 개봉한 영화 ‘백두산’에서 맡은 북한 요원의 이미지가 아직도 생생한데, 이번에는 남한의 역사적 인물을 맡았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이병헌(49)은 “(앞선) 영화 팬들이 당황할 수도 있을 것 같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남산의 부장들’이 ‘백두산’보다 훨씬 먼저 촬영한 작품이거든요(웃음). 그런데 ‘백두산’이 이렇게 일찍 개봉할 줄 몰랐어요. 제가 출연하는 영화가 한 달 간격으로 개봉하는 게 거의 없는 일이어서 약간 묘한 상황이 돼버린 거죠. 어떤 면에서 보면 영화 팬들은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캐릭터를 무척 좋아하고 그걸 가슴에 담아둔 팬들은 그 이미지를 잊고 싶지 않을 텐데, (배우가) 바로 다른 작품에 나오면 배신까진 아니어도 당황스러울 수 있잖아요. 그렇지만 제가 개봉일자를 정하는 건 아니니까요(웃음).”
1월 22일 개봉하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전 40일간의 이야기를 담아 역사 속 인물들의 심리적 갈등과 변화를 날카롭게 묘사한다.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는 이 ‘현대사의 한 페이지’ 속, 이병헌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모티브인 ‘김규평’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캐릭터 연기는 배우 이병헌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사진=BH엔터테인먼트 제공
단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빗어 올린 포마드 헤어와 금테 안경, 빳빳하게 다린 수트를 차려 입은 이병헌의 김규평은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 속 그 사람과 조금 달라 보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실제 역사를 다루면서도 사실 자체에만 매몰되지 않도록 캐릭터를 재설정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때 싱크(Sync·조율)를 완벽하게 맞춰 가야 하는 건지 감독님과 상의를 많이 했죠. 몸매를 살찌우고 빼고, 말투나 목소리 이런 것들을 맞춰야 할지 이야기하는데 감독님이 그런 건 필요 없고 아주 상징적으로 헤어스타일과 안경만 갖추고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어쩌면 젊은 세대에는 그때 그 대통령 모습은 너무나 잘 알려진 터여서 그 모습을 따라 해야 할 수밖에 없지만, 2인자들은 비교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했을 수도 있고(웃음). 중요한 건, 외적인 것보다 그 당시 그 인물의 심리와 감정 상태를 맞추려고 최대한 노력했다는 거죠. 100퍼센트 다 알 수는 없지만 자료와 그 밖의 것들을 종합해서 추측과 생각으로 김규평을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이병헌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고 했다. 그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대사 중에는 단 하나의 애드리브도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는 경호실장 ‘곽상천’ 역으로 출연한 배우 이희준도 증언했다. 출연한 모든 배우가 쉼표나 느낌표, 토씨 하나까지 완벽하게 대사를 암기하고 촬영에 임했다고(관련기사 [인터뷰] ‘남산의 부장들’ 이희준 “연기 괴물 선배들 다 빨아 먹고파”).
배우 이병헌은 ‘남산의 부장들’에서 개인 감정이나 생각을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게 급선무였다고 말한다. 사진=BH엔터테인먼트 제공
“‘남산의 부장들’은 근현대사에서 누구나 다 아는 중대한 사건이잖아요.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도 자료만 찾아보면 다 알 수 있기 때문에 연기를 하는 데 굉장히 한정적이고, 폭이 좁으면서도 내가 배우로서 (설정을) 꼭 지켜야 하는 어려운 작품이었어요. 이 시나리오 안에서 애드리브를 통해 개인적인 감정을 증폭시키는 건 굉장히 위험한 부분이거든요. 내 개인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전혀 개입하지 않고 실존 인물이 처해 있는 상황을 나 자신에게 설득시키는 게 급선무였어요. 일단 내가 설득이 돼야 연기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극중 이병헌이 맡은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은 어둡고 정적인 분위기 일색인 이 영화에서 자신의 감정을 결코 내보이려 하지 않는, 그렇기에 겉보기에는 가장 냉철한 캐릭터다. 2시간가량의 러닝타임에서 그가 감정을 폭발하는 것은 경호실장 곽상천과 대립 신과 후반부 요정에서의 저격 신뿐이다. 그러다 보니 폭발하려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려는 모습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간간이 보여 관객들을 긴장시킨다.
“김규평을 연기할 때 관객들이 그에게 감정 이입이 충분히 돼서 따라 갈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욱하는 부분을 보고 ‘어, 왜 저렇게까지 하지?’라고 의아해하는 부분도 있길 바랐어요. 김규평은 약간 다혈질적인 인물이지만 그 감정을 계속 억누르고 있거든요. 억누르는 감정들이 한 번씩 터질 때, 관객들이 살짝 이질감을 느낄 만한 폭발이 보였으면 했죠. 마지막 시퀀스도 보시면 제정신이 아닌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어라? 잠깐만’ 하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게 돼요. 그런 객관과 주관이 혼돈스럽게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어디로 갈까요?’라고 물어보면 혼돈의 끝을 향해 가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배우 이병헌은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이했다. 사진=BH엔터테인먼트 제공
“곽도원 배우는 종잡을 수 없는데, 그게 매력인 것 같아요. 제가 시나리오를 보면 ‘여기서는 (감정을) 터뜨리겠구나’, ‘여기서는 줄이겠구나’ 대충 느낌이 오는데 곽도원 배우는 다 빗나가요(웃음). 이성민 배우는 첫 신에서 분장을 하고 딱 나오시는데 보자마자 ‘헉’ 했어요. 그 포스가… 그리고 리허설에서 첫 대사를 하시는데 그냥 ‘우와…’ 싶더라고요. 이희준 배우는 또 늘 자기 발전을 해서 눈여겨보게 되고. 모든 배우들과 함께 하면서 ‘이 영화 되게 좋은 영화가 되겠다’라는 기대감이 먼저 들었어요.”
그의 이름 석 자가 걸린 대부분 영화가 그랬지만, 이번 ‘남산의 부장들’에는 특별히 ‘이병헌의 인생 캐릭터’라는 대중의 기대가 개봉 전부터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이미 시사회로 “이병헌의 연기는 반드시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는 호평도 연일 이어지고 있는 상황. “칭찬은 늘 낯간지럽지만 기분도 좋다”는 이병헌은 쑥스러워 하면서도 솔직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연기를 하다 보면 이전의 캐릭터가 겹친다는 평을 받을 수 있는데, 저는 제가 교묘하게 잘 빠져 나왔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쩌면 다음 작품으로 장르나 톤이 다른 영화를 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사실 어떤 영화든지 다 저를 통과해서 나오기 때문에 그 캐릭터에 제가 묻어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굳이 따지자면 저는 매번 형태를 바꾸는 배우라기보다 한두 가지 색과 비슷한 톤을 보여주지만 깊이를 더해가는 배우인 것 같아요. 비슷한 캐릭터를 맡는다고 해서 그걸 피하고 싶진 않거든요.”
자신을 “유기적인 배우”라고 정의한 이병헌은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이했다. 오랜 연기 경력을 바탕으로 확고한 정상의 지위에 오른 그는 젊은 배우들 사이에서 최고의 롤 모델 가운데 한 명으로 늘 꼽힌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선배로서 물론 기분이야 좋지만, 그런 데서 오는 부담감을 솔직히 토로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롤 모델이란 말을 들으면 이 악 물고 ‘어휴, 진짜 잘해야지’ 이런 각오를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이 악 물고 해서 다 잘 되는 거면 진짜 이가 부서져라 하고 있었겠죠(웃음). 그런데 그런 부담감이나 책임감 같은 걸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건 배우에게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게 어깨를 계속 짓누르고 있으면 저는 점점 더 배우로서 경직돼 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부담감보다는 감사함만 받아들이고 털어버리려고 애쓰고 있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