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보수당 하태경 책임대표(가운데)와 유승민 보수재건위원장(왼쪽), 정운천 정책위의장이 1월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당 대표단 회의에 참석해 자료를 살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월 19일 정종섭 의원(초선‧대구 동구갑)은 기자회견을 열고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당이 탈당 사태와 대통령 탄핵을 거치며 거의 붕괴됐다”며 “과감한 인적 쇄신과 통합이 성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탄핵 사태 당시 셀프 탄핵을 주도했던 핵심 인사들은 모두 총선 불출마를 선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출마 명분으로 새보수당 유승민 의원 및 당내 비박계 의원들의 불출마 촉구를 들고 나온 셈이다.
헌법학자 출신인 정종섭 의원은 박근혜 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내며 정계에 입문했고, 20대 공천 당시 진박으로 분류됐다. 이제까지 불출마를 선언한 한국당 의원은 수도권에서 한선교 김영우, PK(부산·경남)에서 김무성 김세연 여상규 김정훈 김성찬 김도읍 윤상직, 비례대표에서 유민봉 조훈현 최연혜 등으로 TK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TK, 게다가 친박계에서 첫 불출마 선언이 나오며 TK 물갈이론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러한 물갈이 기류는 김형오 공관위원장이 21대 총선에서 TK 현역 의원들을 절반 넘게 교체하겠다는 방침을 시사하면서 더욱 달아오르는 기세다. 김형오 위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TK에서 교체가 많이 돼야 물갈이든 판갈이든 된다고 국민들은 볼 것 아닌가”라며 “사형수 심정으로 TK에 눈물의 칼을 휘둘러야 하는 게 내 운명”이라고 언급했다.
김 위원장 한 측근은 “황교안 대표가 김 위원장에게 전권을 내주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TK 대폭 물갈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김 위원장 과거 지역구(부산 영도)인 PK에서 불출마가 이미 상당 부분 이뤄진 것도 지역 친분에서 자유롭게 하고, 김 위원장의 활동 보폭을 더욱 넓혀주는 모양새가 됐다”라고 귀띔했다.
TK는 숨을 죽이면서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정 의원 불출마 이후 뒤를 잇는 불출마 선언은 아직 없는 상황이다. TK 한 초선 의원은 “텃밭이라고 하지만 매번 물갈이만 하다간 초선밖에 안 남을 것이다. 지금 대구만 봐도 중진은 주호영 의원(4선) 한 명이다.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TK에서 지도부도 나올 수 없고, 지역 장악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정종섭 의원이 깃발을 들었지만 쉽게 뒤따를 수 없는 이유”라고 했다.
보수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TK는 25개(대구 12, 경북 13) 지역구 가운데 21명의 한국당 의원이 자리하고 있다. 진박 마케팅과 옥쇄 파동 등 보수 진영 몰락의 단초가 됐던 20대 총선에서도 TK는 굳건했다.
이 때문에 노른자를 차지하려는 ‘TK 쟁탈전’은 거세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이번 선거는 한국당과 통합을 놓고 ‘밀당’ 중인 새로운보수당의 출현으로 더욱 셈법이 복잡해졌다. 가장 주목되는 곳은 ‘대구 동구을’이다. 새보수당 아이콘인 유승민 의원의 지역구로, 친박계 후보가 난립해 ‘배신의 정치 심판’을 외치는 상황이다.
친박계 후보로는 박근혜 정부 시절 장관을 지낸 김재수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박근혜의 변호인’ 도태우 변호사, 박근혜 정부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윤창중 전 대변인 등이 꼽힌다. 이들은 ‘배신자는 물러나라’, ‘유승민 심판에 몸을 던지겠다’, ‘배신의 정치를 끝장내겠다’ 등 출사표를 내며 일제히 유 의원을 겨냥하고 있다. 이 밖에 현재 한국당 당협위원장인 김규환 의원(비례대표)까지 총 11명의 예비후보가 뛰고 있는 등 격전지다.
20대 총선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당선된 김부겸 의원(대구 수성갑)은 대구에서 여권 차기 대선주자를 키우자고 호소하고 있다. 사진=이종현 기자
유승민 의원도 이에 질세라 1월 19일 경북 구미에서 열린 새보수당 경북도당 창당대회 자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사면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며 “이를 위해 보수든 뭐든 할 것 없이 정치권 전체가 노력을 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박근혜 사면론’을 꺼내들며 TK 민심 잡기와 주도권 경쟁에 나선 셈이다.
새보수당 한 관계자는 “유 의원이 예전부터 해왔던 얘기”라며 “이미 동구을 출마를 재차 선언했고 새보수당 대구시당위원장을 맡고 있는 만큼, TK 선거 전반을 맡아야 하는 책무가 있다. 다만 보수통합이 이뤄진다면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에 수도권 출마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당은 보수통합과 대대적인 물갈이를 통해 이번 총선에서 TK 전 지역 석권을 목표로 할 태세다. 특히 김부겸 민주당 의원 지역구인 대구 수성갑 탈환을 잔뜩 벼르고 있다. 보수의 심장을 의미하는 지역이자, TK 석권을 가늠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도전장을 낸 한국당 예비후보는 정순천 당협위원장, 이진훈 전 수성구청장, 김현익·정상환 변호사 등이다.
아직까지 거물급은 없는 상태지만 전략공천이 이뤄질 가능성도 엿보인다. 한국당 지도부 한 관계자는 “수성갑 분위기가 20대 총선과 많이 달라졌다. ‘조국 사태’와 경제 실정이 겹치며 정권 심판론에 대한 여론이 파다하다. 다만 확실한 승부를 위해 젊고 경쟁력 있는 인재를 전략공천 하는 부분도 고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입장에서 TK는 ‘험지’다. 다만 20대 총선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당선된 김부겸 의원(대구 수성갑)과 홍의락 의원(대구 북을)의 지역구 사수와 추가 고지 입성을 노리고 있다. 김부겸 의원은 ‘인물론’에 방점을 찍고 지역민심을 잡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최근 라디오 인터뷰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해 ‘사회적 강자’라고 언급하고, 법무부 검찰 인사와 관련 ‘부당하게 허리를 끊은 것’이라고 한 것도 지역여론을 감안한 발언이란 해석이다. 민주당은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한국당의 안일한 인식을 지적하며 대구에서 여권 차기 대선주자를 키우자며 표심을 호소하는 양상이다.
대구 북을에선 김승수 전 대구시 행정부시장, 이달희 전 경북도 정무실장 등이 한국당 예비후보로 뛰는 상황이다. 새누리당(한국당 전신) 서상기, 주성영 전 의원 출마도 거론된다. 이에 홍의락 의원은 “대구 선거판은 아귀다툼”이라며 바짝 경계를 하고 있다.
이 밖에 민주당에선 구미을에 지역위원장인 김현권 의원을 포함해 대구 수성을에 이상식 전 국무총리비서실 민정실장, 대구 중남에 이재용 전 대구 남구청장 등이 출사표를 던지는 등 TK 도전을 예고하고 있다. 전 지역에 후보군을 내는 한편, 여권의 이점인 지역 예산 지원을 통해 대대적인 지원 사격을 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보수야권이 통합을 이뤄내지 못하고 분열된 상태에서 선거를 치른다면 이 역시 여권의 유리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도 예상된다.
권준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