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유일한 보상선수였던 이형범은 새 소속팀 두산 베어스에서 마무리를 꿰차며 맹활약했다. 사진=연합뉴스
자연스레 외부 FA 영입에 따른 보상선수 수도 줄어들었다. KBO 규약 제172조 ‘FA 획득에 따른 보상’ 조항에 따르면, FA가 원 소속구단 이외의 다른 구단과 선수 계약을 했을 때 원 소속구단은 선수를 데려간 구단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적한 FA 선수의 그해 연봉 200%에 해당하는 보상금과 상대 구단 20인 보호선수 외 1명의 선수 계약을 양수하거나 연봉의 300%에 해당하는 금전 보상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보상금만 선택하는 팀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부분 보상선수 지명을 통해 전력 누수를 최소화하려 한다. 20인 보호선수와 보상선수에는 군 보류선수, 당해연도 FA, 외국인선수, 당해연도 FA 보상 이적선수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전급을 한 명이라도 더 20인 안에 넣으려는 구단과 더 좋은 선수를 데려가려는 구단의 눈치싸움도 치열해진다. 이적한 보상선수가 의외의 ‘잭팟’이 될 수도 있어서다.
#이형범이 다시 불 지핀 ‘보상선수 희망’
FA 제도가 처음 도입된 1999년 이후 지금까지 보상선수로 지명돼 유니폼을 바꿔 입은 선수는 모두 42명이다. 2000년 해태 타이거즈 이강철과 LG 트윈스 김동수가 나란히 삼성 라이온즈와 첫 FA 계약을 하면서 삼성 프랜차이즈 스타인 박충식과 김상엽이 각각 해태와 LG의 지명을 받은 게 그 시작이다. 이듬해인 2001년에는 FA 홍현우가 해태에서 LG로 이적하면서 LG 소속이던 최익성이 보상선수로 팀을 옮겼고, 2002년에는 현대 유니콘스 출신 FA 박경완이 SK 와이번스와 계약하면서 SK 조규제가 현대로 갔다. 이 외에도 많은 유망주들 혹은 전성기를 조금 지난 베테랑들이 보상선수로 지목돼 팀을 옮겼다.
보상선수로 지명됐다는 것은 원 소속팀이 보호전력으로 묶은 20명 안에 들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상 이적한 FA의 3분의 1 가치에 해당하는 선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 때문에 보상선수들의 상실감도 컸고, 실제로 이적 후 크게 성공한 사례도 많지 않다. 1군에서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은퇴한 선수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의외의 활약으로 팀을 웃게 만든 선수도 충분히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해 양의지의 보상선수로 뽑혀 NC에서 두산으로 팀을 옮긴 투수 이형범이 그렇다. NC에서 세 시즌 동안 단 39경기에 나서 단 2승을 올리는 데 그쳤던 이형범은 두산에 오자마자 불펜의 핵심 역할을 해냈다. 기존 불펜 투수들의 부상과 부진으로 고생하던 두산에 단비와 같은 존재였고, 결국 시즌 중반 이후 가장 중요한 마무리 역할까지 맡았다.
이형범은 지난 한 시즌에만 이전 세 시즌 경기 수의 2배에 가까운 67경기에 출전해 61이닝을 소화했고, 6승 3패 19세이브 10홀드에 평균자책점 2.66을 기록하면서 확실하게 1군 주축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양의지를 보내고 상실감이 컸던 두산으로서는 이형범의 활약이 기대를 뛰어 넘고도 남은 소득. 이형범 본인에게도 천금 같은 기회였음은 물론이다. 심지어 이형범은 이미 군복무를 마쳤고 나이도 26세라 미래 가치까지 높다. 향후 ‘역대 최고의 보상선수’로 기록될 가능성도 있다.
올해 FA 안치홍을 롯데에 내준 KIA도 ‘제2의 이형범’을 노리면서 20세의 젊은 투수 김현수를 보상선수로 선택했다. 지난해 신인인 김현수는 롯데가 2차지명 3라운드에서 전체 28순위로 지명한 오른손 투수다. 지난해 1군 경험도 쌓았다. 6경기에서 1패를 기록했지만 평균자책점은 1.42로 준수했다. 퓨처스리그 성적은 23경기 47과 3분의 2이닝 3승 2패 평균자책점 5.85. KIA 역시 불펜이 강하지 않은 팀이라 보상선수 성공 신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보상선수로 팀을 옮겼던 이원석은 FA 자격을 획득하며 자신이 보상선수를 발생시키는 선수가 됐다. 사진=연합뉴스
#역대 보상선수 성공 사례들
두산에서 삼성으로 이적한 이원석도 대표적인 ‘윈-윈’을 이룬 선수다. 이원석은 2008년 롯데와 계약한 FA 홍성흔의 보상선수로 두산 유니폼을 입었다. 두산은 내야수 전력이 풍성한 팀이라 이원석이 금세 자리를 잡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공수에서 쏠쏠한 활약을 펼치며 팀의 주전으로 성장했다. 2016시즌을 마친 뒤에는 FA 자격을 얻어 삼성과 4년 27억 원에 계약했다. 역대 보상선수 출신 FA 중 최고액 계약. 보상선수로 팀을 옮긴 그가 이번엔 다른 보상선수(포수 이흥련)를 원 소속팀으로 보내면서 유니폼을 갈아입은 셈이다.
한화 이글스 문동환은 역대 보상선수 가운데 최고 성공 사례로 꼽힌다. 2003년 롯데가 FA 정수근을 영입할 때 두산의 보상선수로 지명됐고, 곧바로 포수 채상병과 트레이드돼 한화로 건너갔다. 그는 이적 첫해인 2004년 부진했지만 2005년 10승, 2006년 16승을 각각 올리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특히 2006년에는 18승을 올린 ‘괴물 신인’ 류현진과 원투펀치를 이뤄 팀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힘을 보탰다. 보상선수 지명이 오히려 문동환에게는 마지막 불꽃을 태울 기회가 됐다.
LG도 2016년 보상선수 선택으로 덕을 봤다.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한 소득이었다. 그해 마무리 투수로 활약한 임정우 덕분이다. 임정우는 원래 SK 소속이었지만 2011년 말 FA 포수 조인성의 보상선수로 팀을 옮겼다. 이후 꾸준히 성장하다 이적 다섯 시즌 만에 마침내 소방수 자리까지 꿰차고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LG로서는 전혀 밑질 게 없는 장사였다. 다만 이듬해 부상을 당해 시즌 중반에야 팀에 합류했고, 2018년에는 개인사로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렸다. 지난해부터 사회복무요원으로 군복무를 시작했다.
LG가 2011년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에서 FA 이택근의 보상선수로 데려온 윤지웅 역시 2014년부터 4년간 LG 좌완 불펜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
SK 최승준은 2015년 말 FA 정상호의 보상선수로 뽑혀 LG에서 팀을 옮긴 뒤 이적 첫 해 홈런 19개를 쳐 잠재력을 터트렸다. 역대 보상선수 이적 첫 시즌 최다 홈런 기록. 이전까지는 2004년 FA 진필중의 보상선수 자격으로 LG에서 KIA로 팀을 옮긴 손지환이 이듬해 홈런 13개를 때려낸 게 최다였다. 최승준은 특히 그해 6월 28일 수원 KT 위즈전에서 한 경기 3연타석 홈런 기록을 작성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시즌 후반 부상으로 주춤하긴 했지만 SK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였다.
KIA도 포수 한승택 덕분에 웃었다. 2014년 FA 외야수 이용규를 한화로 보내면서 데려왔던 젊은 포수다. 당시 한승택은 군 입대를 앞둔 상황이었지만, 주전 포수 김상훈의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 미래를 내다본 선택을 했다. 한승택은 지난 시즌 105경기에 출전하면서 제 몫을 했고 블로킹, 송구, 투수 리드 모두 수준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상선수와 인연이 깊은 선수들
‘보상선수’라는 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선수도 있다. 두산 베테랑 투수 김승회가 그렇다. 김승회는 보상 선수로만 두 번 지명돼 두 차례 팀을 옮긴 전력이 있다. 2003~2012년 두산 소속 선수였지만, 2012년 말 롯데 홍성흔이 친정팀 두산과 다시 FA 계약을 맺을 때 롯데의 지명을 받아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후 롯데 불펜에서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김승회는 3년 뒤 다시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SK 출신 FA 윤길현이 롯데와 계약하자 SK가 보상선수로 김승회를 찍어서다. 남들이 한 번 경험하기도 어려운 보상선수 지명을 두 번이나 겪은 것이다. 20인 밖에 있는 선수들 가운데서는 늘 다른 팀들이 가장 탐낼 만한 선수였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반대로 두 번 모두 20인 보호선수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 것이어서 기분이 좋을 리 만무하다.
그런 김승회는 2016시즌을 끝으로 마침내 FA 자격을 얻었다. 처음으로 보상선수가 아닌 계약 당사자로 FA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그해 SK에서 이전만큼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판단 아래 권리 행사를 포기하고 FA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문제는 SK가 김승회를 방출하면서 오갈 곳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가장 오랜 기간 뛴 친정팀 두산이 다시 김승회에게 손을 내밀어 선수 생활을 연장했고, 지난해 마침내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면서 프로 17년 만에 한을 풀었다. 올해 역시 두산 불펜에서 활약한다.
그런가 하면 한화 안영명은 보상선수로 지명된 덕분에 극적으로 친정팀에 돌아간 케이스다. 2009년까지 한화에서 뛰었던 FA 이범호는 1년간의 짧은 일본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2011년 초 KIA와 FA 계약을 맺었다. 보상은 원 소속구단이던 한화가 받았다. 이때 한화가 지명한 보상선수가 바로 안영명이다. 안영명은 천안북일고를 졸업하고 2004년 한화 1차 지명으로 입단한 투수. 팀 마운드의 리더가 될 재목으로 꾸준히 기대를 받아왔다.
그러나 2010년 한화와 KIA의 3 대 3 트레이드를 통해 고향팀을 떠났다. 한화가 장성호, 김경언, 이동현을 받고 안영명, 김다원, 박성호를 내주는 트레이드였다. 타선 보강이 급했던 한화는 베테랑 타자 장성호를 데려오기 위해 안영명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1년 만에 기회가 생기자 안영명을 되찾아왔다. 당시 한화 사령탑이던 한대화 감독은 “보내고 나서 가장 아쉬운 선수였는데, 다시 찾아오게 돼 기쁘다”고 했다. 안영명 역시 올해도 한화 마운드의 한 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두산 정재훈은 안영명과 정반대 케이스지만 마찬가지로 보상선수와 기막힌 인연이 있는 투수였다. 2003년 입단한 뒤 마무리 투수와 불펜승리조, 선발 투수를 두루 맡으면서 12년간 마당쇠 역할을 했던 그는 두산이 2015시즌을 앞두고 영입한 FA 투수 장원준의 보상선수로 지명돼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됐다. 그러나 이적 후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다시 친정팀으로 돌아왔다. 두산이 2015시즌 종료 후 열린 2차 드래프트에서 정재훈을 지명해 원래 자리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롯데에서 주로 2군에 머물렀던 정재훈은 정든 친정팀 유니폼을 입고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셋업맨으로 활약하면서 46경기에서 23홀드 2세이브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해 든든한 허리 역할을 했다. 한창 승승장구하던 8월 LG와 경기 도중 팔에 타구를 맞아 불의의 부상을 당했고 끝내 한국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은 게 아쉬움이다. 두산 선수들은 모두 모자에 정재훈의 등번호 ‘41’을 새기고 경기에 나섰고, 두산은 시리즈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정재훈에게 우승 반지를 추가 제작해 선물했다. 정재훈은 이후 마운드에 복귀하지 못하고 은퇴해 현재 두산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