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혜영 더불어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이 1월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에서 열린 공천관리위원회 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며 개의를 선언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공포가 현실이 됐다.”
민주당 공천관리위원회는 지난해 11월부터 의원들의 입법실적과 기여도 등을 점수로 환산해 의원 평가를 진행했다. 공천 기준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업은 얼마 전 끝난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민주당에선 이를 공개 발표한다는 방침이었지만 내부 반발로 비공개 개별통보로 선회했다.
한 친문 의원은 “솔직히 공개 발표는 우리 쪽(친문)에서도 부정적인 견해들이 많았다. 공천할 때 내부 자료로 쓰면 되는 것인데, 굳이 공개해서 망신을 줄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계파를 떠나 그래도 동료고, 같은 소속인데 제 살 깎아먹기라는 지적도 많았다”라고 했다. 그는 “일부 의원들이 국민 알 권리 차원에서 공개하자고 주장하긴 했지만 총선을 앞두고 오히려 당 분란만 가중시킬 것이란 우려가 더 컸다”고 덧붙였다.
하위 20% 수는 22명이다. 민주당은 설 연휴가 끝난 직후인 1월 28일 명단에 속한 의원들에게 통보하기로 했다. 이들은 경선 탈락을 의미하는 ‘컷오프’가 아닌, 감점을 받는다. 원칙적으론 얼마든지 경선에 도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최대 25% 가산점을 받는 여성이나 신인 후보와 맞붙을 경우 경선 통과는 불가능해진다. 시작부터 45%가량의 격차가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살생부라 불리는 하위 20% 명단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것으로 전해졌다. 1월 20일엔 ‘도는 글, 하위 20%’란 제목으로 의원 12명 이름이 카카오톡 등을 통해 빠르게 퍼졌다. 그보다 앞선 1월 18일 토요일 오후에도 비슷한 내용의 ‘지라시’가 민주당 관계자들 사이에서 돌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역시 ‘하위 20%’란 제목 아래 14명 의원들 실명이 적시돼 있었다. 1월 20일자 명단과 중복되는 의원들도 있었다.
18일 돌았던 명단은 외부로는 유출되지 않았지만 이를 받아본 인사들은 그 면면을 보고 충격에 빠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틀 뒤 또 다른 버전의 ‘도는 글’이 확산되자 민주당 내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누군가 의도를 갖고 미확인 명단을 뿌리고 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명단에 이름이 거론된 의원실 관계자들 역시 하나같이 “악의적으로 지어낸 소설”이라며 불쾌해했다.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 11호 방위산업전문가 최기일 건국대학교 산업대학원 겸임교수와 이해찬 대표 등 참석자들이 1월 21일 국회에서 열린 인재영입 발표 기자회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특히 비문 진영에선 불만 기류가 팽배하다. 명단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이를 만들어 뿌린 배후가 친문 쪽 아니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실제 두 명단을 입수해 확인해본 결과, 친문 실세로 꼽히는 의원들은 없었다. 대부분 중도 성향이거나 비문으로 분류되는 의원들이었다. 명단에 포함된 한 의원은 1월 21일 일요신문과 만나 “지역도 다양하고, 초선부터 중진까지 골고루 있는데 친문은 없더라. 그들이 만들지 않고선 가능한 일이냐”고 반문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평가를 하기 전부터 소위 ‘찍힌’ 의원들 이름이 거론됐는데, 그들 중 일부가 이번 지라시에 있었다. 나를 비롯해 그들이 진짜 살생부 명단에 포함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문제 아니냐. 본인조차 모르는 명단을 누군가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평가 자체에 대한 공정성 시비가 나올 수밖에 없다. 명단이 거짓일 경우 지금 누가 왜 그런 내용을 퍼트린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비문계 의원들은 청와대 참모 출신 등 친문 정치인들이 대거 총선에 출사표를 던지고 있는 것과 현 상황을 연관 짓기도 한다. 비문 솎아내기 일환으로 보는 것이다. 그동안 민주당 내부에선 현역 의원 공천 탈락 자리를 ‘청와대발 낙하산’이 차지할 것이란 추측이 무성했다. 본격적인 공천 심사를 앞두고 비문 의원들을 흠집 내려 지라시 등을 만들어 유포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대목은 친문 핵심으로 꼽히는 한 청와대 고위 인사가 그 배후로 거론된다는 점이다. 출처 불명의 하위 20% 명단이 돌기 시작했던 1월 18일 한 민주당 중진 의원은 “지난해 연말 식사 자리에서 만난 한 청와대 인사가 퇴출 후보로 지목했던 의원들 대부분이 명단에 포함돼 깜짝 놀랐다. 거의 일치했다”면서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총선을 앞두고 세 확산에 나선 친문계의 최근 움직임을 봤을 때 대수롭게 넘길 수 없었다”고 귀띔했다.
실제 이름이 거론된 청와대 인사는 민주당 소속의 한 친문 관계자와 함께 총선 전략 수립을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청와대 인사와 가까운 한 민주당 전직 의원은 “신분상 대놓고 입장을 밝힐 수는 없지만 총선 판세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민주당 의원들과 수시로 접촉해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가 여의도와 광화문 일대에서 민주당 친문 실세들과 만나는 모습은 여러 차례 포착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친문계에서는 “사실과 다르다”며 펄쩍 뛴다. 자칫 청와대가 선거에 개입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으로 불거질 수 있기 때문으로 읽힌다. 앞서의 민주당 중진 의원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난 그렇게 믿고 싶다. 선거를 앞두고 지라시 같은 게 도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지금 비문 쪽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악재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쉽게 승복을 하겠느냐”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친문 쪽 인사들은 처신을 신중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