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연말 ‘2019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은 트로트 가수 유산슬의 수상 소감이다. 그가 데뷔 29년차 방송인 유재석이라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안다. 하지만 2019년 유산슬이라는 캐릭터로 활동한 그가 신인상을 수상한 것에 이견을 다는 이는 없다. 유산슬은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을 비롯해 길거리 공연에 나서고,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KBS 1TV ‘아침마당’에 출연해 신인 트로트 가수들과 자웅을 겨뤘다. 일반적인 신인들과 다름없는 행보를 보인 셈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대중은 알고도 속아 준다. ‘캐릭터 놀이’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2019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은 트로트 가수 유산슬. 그가 데뷔 29년차 방송인 유재석이라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안다. 사진=MBC
#유산슬, 펭수 그리고 카피추
유산슬이 2019년 등장한 신인 중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인간’이라면, 동물 중에서는 단연 펭수가 으뜸이다. 남극에서 왔다는 EBS 연습생 펭수는 키가 무려 210cm인 거대 펭귄이다. “저 펭귄 탈을 쓴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이 나오면 펭수의 팬들은 호통을 친다. “펭수는 펭귄일 뿐”이라고.
2019년 11월초 펭수는 외교부를 방문했다. 국가 기관 출입시 신원 확인은 필수다. 이 과정에서 그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하는 것을 확인한 JTBC가 “펭수는 남성”이라고 농담 섞인 보도를 했다가 네티즌으로부터 된서리를 맞았다. 팬들은 “성 역할을 거부하는 펭수의 이미지를 훼손했다”고 질타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펭수에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되물을 법하다. 하지만 ‘초통령’(초등학생들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뽀로로에 맞서 ‘직통령’(직장인들의 대통령)으로 등극한 펭수와 캐릭터 놀이에 빠진 팬들에게 펭수는 펭수일 뿐이다.
이 바통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카피추가 이어받았다. 방송인 겸 작가인 유병재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속 콘텐츠인 ‘창조의 밤 표절 제로’에 출연한 카피추는 그동안 산 속에서 50년 동안 오직 음악만 하다가 하산한 자연인으로 분한다.
MBC 공채 출신인 18년차 개그맨 추대엽은 산 속에서 50년 동안 오직 음악만 하다가 하산한 자연인 캐릭터 카피추로 활동 중이다. 유튜브에서 ‘아기 상어’를 ‘아기 상어라지만’으로 자기 멋대로 바꿔 부르며 “100% 창작곡”이라고 주장한다. 사진=유튜브 채털 ‘카피추’ 화면 캡처
그는 누가 들어도 알 법한 노래를 살짝 비틀어 부르며 “100% 창작곡”이라고 주장한다. ‘달려있는 하니’(달려라 하니), ‘으른이’(으르렁), ‘아기 상어라지만’(아기 상어) 등을 자기 멋대로 바꿔 부르는 모습을 보면 실소가 터진다. 카피추 역시 천연덕스럽게 부르다가 스스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카피추의 정체는 MBC 공채 출신인 18년차 개그맨 추대엽이다. 오랜 무명 생활을 하던 그는 카피추라는 캐릭터로 단박에 주목받았다. 대중과 동료들은 그의 정체를 알지만 그냥 카피추로 대해준다. MBC ‘전지적 참견 시점’에 출연했을 때는 절친한 선배인 송은이가 “친한 동생 중에 추대엽이라고 있는데 너무 닮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놀이는 요즘 방송가에서도 흔히 쓰인다. 2018년 방송된 Mnet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777’에는 고무장갑과 같은 분홍색 복면을 쓴 래퍼가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고무장갑 콘셉트를 대변하듯 ‘마미손’이다. 이후 그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고, 힙합을 좋아하는 팬들은 일제히 래퍼 매드클라운을 지목했다. 하지만 매드클라운은 모르쇠로 일관했고, 마미손의 이름으로 앨범도 발표했다.
최근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종합편성채널 TV조선 ‘미스터트롯’에도 복면을 쓴 트로트 가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 가수를 보며 출연진들은 중견 가수 JK김동욱을 거론했다. 하지만 그는 “결승에 진출하면 복면을 벗겠다”고 말할 뿐, 자신의 정체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가 본선 무대에서 탈락하면서 그가 정체를 공개할 기회는 사라졌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가 누구인지를. 다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을 뿐이다.
“저 펭귄 탈을 쓴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펭수의 팬들은 “펭수는 펭귄일 뿐”이라고 호통을 친다. 사진은 제야의 종 타종 당시의 펭수. 사진=서울시 제공
캐릭터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게 무슨 재미냐?”고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가 제시한 또 다른 놀이법일 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드라마 ‘도깨비’가 방송되던 시절, 배우 공유를 보며 대중은 “도깨비다”라고 외치며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 꽂힌 칼을 뽑는 시늉을 했고, ‘태양의 후예’의 인기가 높을 때는 배우 송중기를 “유시진 대위”라고 부르며 “~말입니다”라는 말투를 따라 했다. 영화 ‘베테랑’이 상영되던 시기에는 배우 유아인처럼 눈을 치켜뜨며 “어이가 없네”라고 이죽거리던 이들이 많았다. 그들 모두 유아인이 영화 속 안하무인 재벌 3세 조태오가 아니라는 것은 다 안다. 하지만 그 캐릭터의 매력에 빠져 이를 연기한 배우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캐릭터 놀이는 ‘키덜트’(키즈+어덜드) 문화의 확산과도 맞닿아 있다. 어린이들은 뽀로로 외에도 번개맨, 미키마우스, 미미 등을 현실 속에 존재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그래서 놀이동산에 가면 인형 탈을 쓴 이들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긴다. 나이를 먹고 몸은 자랐어도 이런 동심을 간직하고 있는 키덜트들에게 유산슬, 펭수, 카피추 등은 이를 대체할 더없이 좋은 놀이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유산슬이 유재석이라는 것을 카피추가 추대엽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펭수가 인형이라는 것도 안다. 심지어 포털사이트에서 ‘펭수’를 검색하면 이를 연기하는 배우의 이름까지 연관검색어로 뜬다. 하지만 이를 놀이 문화로 받아들이는 대중에게 그들의 정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한 연예계 관계자는 “산타클로스는 실존하지 않지만 아이들에게 그 현실을 얘기하지 않고 선물을 안기듯, 굳이 키덜트들이 좇는 재미를 박탈할 이유는 없다”며 “이 또한 유행처럼 피고 지는 하나의 흐름이라 보면 된다”고 말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