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범 감독은 U-23 대표팀 부임 이후 2년 만에 2개 대회의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무명 선수 출신’이 들어올린 우승컵
올림픽 지역예선을 겸해 치러진 이번 대회에서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으며 전승 우승을 거뒀다. 김 감독은 2018년 2월 U-23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이후 치른 2개 대회(아시안게임, U-23 챔피언십)에서 잇달아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김학범 감독은 누구보다 극적인 축구 인생을 걸어왔다. 축구계에서는 그를 두고 ‘비주류의 설움을 딛고 일어선 인물’이라고 입을 모아 평가한다. 베트남 신화를 만들고 있는 박항서 감독도 일각에서 비주류로 분류하지만 박 감독은 청소년대표와 A대표 선수를 지냈고 K리그에서 100경기 넘게 출전(115경기 20골 8도움)한 경력이 있다. 김 감독에 비하면 스타 선수 출신인 셈이다.
엘리트주의가 팽배한 국내 축구 현실에서 김 감독의 성공은 이례적인 일이다. 대표팀을 제외하면 국내 지도자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장인 K리그1만 살펴보더라도 현직 8명의 감독은 모두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는 스타 출신이다. 김도훈, 최용수, 이임생, 김남일 등 이들의 A매치 기록을 합치면 300경기가 넘는다. 프로무대 출전 기록은 2000경기에 육박한다. 1984년 1년간 K리그 13경기(1골) 출전에 그친 김학범 감독의 경력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럼에도 김 감독은 지도자로서 성공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다만 지도자 생활이 내내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공부하는 지도자 ‘학범슨’
친정팀 국민은행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한 김학범 감독은 올림픽 대표팀 트레이너를 거쳐 1998년 천안 일화의 코치가 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 팀이 연고지를 성남으로 옮기면서 강팀으로 떠오르자 그의 지도자 생활도 첫 황금기를 맞았다. 수석코치 시절에도 남다른 리더십으로 주목받았고 감독직에 오른 이후에도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 시기 김 감독은 운동생리학 박사 학위를 받으며 ‘공부하는 지도자’로 불렸다. 틈날 때마다 남미, 유럽 등 축구 선진국을 방문해 축구 공부를 꾸준히 했다. 지도자 연수에 사비를 들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라운드에선 성남 시절 3명의 수비수를 두는 스리(3)백이 대세였던 K리그에 포(4)백을 도입하는 등 전술적 면모로 ‘학범슨(김학범+알렉스 퍼거슨)’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성남에서 영광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2008년 K리그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음에도 우승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경질됐다. 중국 허난 젠예 감독직을 잠시 맡았지만 짧은 기간 안에 또 경질됐다. 한동안 야인생활을 거친 김학범 감독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시·도민구단 지휘봉을 잡기 시작했다. 강원 FC, 성남 FC, 광주 FC 등에서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이내 ‘가난한 구단’의 한계를 드러내며 인연이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국내 무대에서 젊은 감독들이 성과를 내고 각광을 받으면서 ‘노(老)감독’의 자리도 그렇게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2018년 U-23 대표팀에 부임, 짧은 준비 기간으로 인해 많은 우려가 뒤따랐던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황의조 등의 선발로 ‘인맥 축구’ 잡음이 일기도 했지만 금메달을 따내면서 논란을 종결시켰다.
김학범 감독은 U-23 챔피언십 대회 엔트리 내 다양한 선수들을 고루 활용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사진=대한축구협회
#환갑 맞은 김 감독의 진화
1960년생인 김학범 감독은 한국 나이로 올해 61세로 환갑을 맞았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지도자로 지내고 있지만 이번 U-23 챔피언십에서 그는 또 한 번 진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 감독은 과거 K리그를 호령하던 성남 시절부터 분석력과 ‘판짜기’ 능력 면에서 인정받았다.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이겼다”는 선수들의 증언과 “우리를 잘 분석했다”는 상대 감독의 인터뷰로 능력을 증명했다. 다만 유연성이 떨어지는 선수 기용과 변수에 대한 대처는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단점을 U-23 챔피언십에서 극복하는 모습을 보이며 박수를 이끌어냈다.
중국, 이란, 우즈베키스탄 등 까다로운 국가들을 만난 조별리그 3경기에서 김 감독은 엔트리 23인 중 골키퍼 2명을 제외한 21명을 모두 활용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4-2-3-1 포메이션은 여전했지만 매 경기 선발 명단이 달랐다. 때론 절반 이상이 교체되기도 했다. 선수층이 두꺼운 팀도 단기간 동안 열리는 대회에서는 고정 선발명단을 끌고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 감독은 파격적인 운영으로 우승이라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교체카드의 활용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중국과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교체 투입된 이동준이 후반 막판 ‘극장골’을 넣은 대표팀은 8강과 4강에서도 조커가 승부를 결정지었다.
‘호랑이 감독’으로 알려진 김학범 감독이지만 환갑에 이르면서 덕장의 면모도 선보이고 있다. 대회에 앞서 많은 기대를 받고 나선 분데스리가 출신 정우영이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좀 더 힘을 빼야 한다. 아직 어리고 가능성이 큰 선수”라며 선수를 감싸 안았다.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장에서 나이가 40세가량 차이가 나는 어린 선수들과 턱걸이 내기를 하는 부드러운 모습이 공개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학범 감독은 귀국길에서 2020 도쿄 올림픽에서 동메달 이상의 성적이 목표임을 밝혔다. 사진=대한축구협회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U-23 대표팀 감독 부임 이후 두 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린 김학범 감독의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김 감독의 계약 기간은 오는 7월 개막하는 2020 도쿄 올림픽까지다. 축구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 남아 있다.
우승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지난 1월 28일 귀국 현장. 김 감독은 차분하게 올림픽을 준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관심이 쏠린 와일드카드(24세 이상 선수)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모든 선수가 후보”라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뒀다.
선수 선발에 대한 기준을 공개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옭아맸던 일부 전임 감독과 달리 말을 아끼기도 했다. “어떤 선수든 내가 필요한 자원이면 얼마든지 데려갈 수 있다”는 의중을 밝혔다. 그는 이례적으로 이번 대회에도 이미 병역 혜택을 받은 선수들(김진야 송범근 정태욱)을 데려갔다.
사상 최초 U-23 챔피언십 우승을 이룬 김 감독은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이상의 기록”을 목표로 설정했다.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노감독이 올림픽 축구경기 일정을 마친 후 어떤 모습으로 귀국할지, 팬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