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 보호막이 사라졌다. 자신을 둘러싼 철옹성이 한 꺼풀 벗겨진 셈이다. 허허벌판에 혈혈단신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대권 직행 열차에 몸을 싣느냐, 정치적 은퇴냐의 갈림길에 섰다. 여권 유력 차기 주자 이낙연 전 국무총리 얘기다. 이 전 총리가 승부의 링에 올랐다. 희생의 아이콘 같은 정치적 수사는 필요 없다. 종로 대첩은 패해도 본전인 선거가 아니다.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총리 전성시대는 그대로 막을 내린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1월 23일 오전 서울 용산역에서 더불어민주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 제안 관련 입장 발표를 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이 전 총리의 가장 큰 강점은 최대치에 달한 ‘정치적 가수요’다. 경제학 용어인 가수요는 당장 필요가 없음에도 일어나는 수요다. 전제 조건은 물가 상승이나 물자 부족이 예상될 경우다. 이 전 총리가 여의도 복귀한 직후 ‘쏟아지는 후원회장 러브콜’이 대표적인 정치권의 가수요 현상이다. 이는 선거 승리의 직접적 요인은 아니지만, 차기 대권 주자에게 흔히 일어난다.
이 전 총리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강훈식(초선·충남 아산을) 김병관(초선·경기 성남분당갑) 의원과 이화영(초선·경기 용인갑) 전 의원을 비롯해 최택용 전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부산 기장), 박성현 부산 동래구 지역위원장, 이삼걸 전 행정안전부 차관(경북 안동), 허대만 경북도당위원장(경북 포항) 등의 후원회장을 맡는다. 이 전 총리가 정치인의 후원회장 자리를 수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중 옛 손학규계로 분류되는 강 의원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신념과 험지 출마자 위주로 후원자를 자청했다. 민주당 손학규 호 시절 이 전 총리와 강 의원은 당 사무총장과 정무특보를 각각 맡았다. 강 의원은 민주당 원내대변인 맡기 전 과거 명대변인으로 불렸던 이 전 총리의 ‘촌철 논평’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김병관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20대 총선 당시 영입한 인사다. 이화영 전 의원은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복심으로 통한다. 최택용 박성현 이삼걸 허대만 등은 부산·울산·경남(PK)과 대구·경북(TK) 등 험지 출마자다. 이 전 총리가 호남 인사 대신 비문(비문재인)계와 영남권 총선 출마자의 후원회장을 자처한 것은 사실상 ‘자기 세력화’를 위한 승부수로 보인다. 이낙연 프리미엄을 필요로 하는 총선 출마자들과 자기 정치 구축에 나서려는 이 전 총리의 이해관계가 맞았다는 얘기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 국면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적 가수요를 ‘실수요’로 전환하는 모멘텀을 만들 수 있느냐다. 실수요는 실제 사용을 전제로 물품을 구입하는 수요다. 이른바 당내 ‘이낙연 사람들’이 구축되는 분기점도 이 전 총리에 대한 정치적 가수요가 실수요로 전환될 때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정세균 국무총리와 배턴 터치한 종로 대첩의 최후 승자 등극 후 ‘당내 세력 구축→대권 도전’이다.
하지만 갈 길은 구만리다. 크게 △국무총리가 아닌 정치인 이낙연에 대한 송곳 검증 △문 대통령과의 차별화 △종로 승리 방정식 찾기 등 세 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첫 번째 변수부터 첩첩산중이다. 이 전 총리가 여의도로 복귀하자 검증 칼날은 한층 날카로워졌다. 적잖은 구설에도 올랐다. 첫 테이프는 문재인 정부의 아킬레스건인 ‘부동산 논란’이 끊었다.
이 전 총리는 1월 18일 그간 거주해온 서울 잠원동 아파트 전입 시기와 관련해 “착오가 있었다”며 “종로에 살다 1994년 강남으로 이사했고 1999년에 잠원동 아파트에 전입했다. 그 시기를 혼동했다”고 밝혔다. 종로 출마를 위해 전세 계약을 한 아파트의 대출 시기를 둘러싼 논란이 제기된 직후다. 이 전 총리는 정부의 전세 대출 규제 시행 전에 대출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자, “1994년부터 살아온 아파트를 전세 놓고, 그 돈으로 종로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간다”고 해명했다. 이에 야권 한 의원은 “부동산 투기꾼들의 주로 쓰는 ‘똘똘한 한 채’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1월 23일 오전 용산역에서 더불어 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이낙연 전 국무총리, 이인영 원내대표 등 지도부가 귀성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또 다른 논란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터졌다. 이 전 총리는 이틀 뒤인 1월 20일 북한 전문 여행사 계정을 팔로했다는 지적에 대해 “부적절한 상대는 그때그때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이 전 총리는 북한의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도 팔로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 전 총리가 종로 출마를 수락한 이후인 1월 24일에는 ‘쇼잉’ 논란에 휩싸였다. 이 전 총리는 당시 종로구 창신골목시장과 통인시장 방문을 위해 종각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갈아탔다. 동대문역에서 하차한 그는 지하철 이용 시 사용되는 교통카드를 제대로 찍지 못했다.
지하철 교통카드는 통상 개찰구 오른쪽 단말기를 찍고 나오도록 설계돼 있다. 이 전 총리 측은 “서민 코스프레가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이준석 새로운보수당 젊은정당비전위원장은 “수도권 선거는 처음이실 테니 앞으로 이런 포토제닉이 많을 것 같기는 하다”며 “우리 정치인들이 일반 대중의 삶과 괴리되는 시점이 발생하는 것은 왜일까”라고 꼬집었다. 여의도 안팎에선 총선 국면이 본격화하면, 보수 야당을 중심으로 ‘이낙연 검증 태스크포스(TF)’를 꾸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두 번째 변수는 차별화 전략이다. 이른바 ‘이낙연 브랜드’를 구축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이 전 총리의 강점은 ‘안정감’이다. 신중한 언행과 합리적 리더십을 통해 차기 대권 주자로 발돋움했다. 다만 안정감은 행정부 수반 2인자에게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인상 비평’에 가깝다. 한국 정치에서 총리가 가진 위치는 대통령의 국정을 뒷받침하는 최고참 참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전 총리가 높은 지지도와 일부 인사제청권 행사로 책임총리 지위에 다가갔지만, 여전히 ‘포스트 문재인’ 지위를 누릴지는 미지수다.
그 중심에는 ‘총리 잔혹사’가 자리 잡고 있다. 김영삼(YS) 정권 때인 이회창(26대) 이홍구(28대) 이수성(29대) 고건(30대·35대) 전 국무총리와 김대중(DJ) 정권 때인 김종필(JP) 박태준(32대) 이한동(33대) 전 국무총리 등은 일제히 대권 고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노무현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건 전 총리를 비롯해 이해찬(36대) 한명숙(37대) 등도 대권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이명박(MB) 정권의 정운찬(40대) 김황식(41대) 전 총리와 박근혜 정권의 이완구(43대) 전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정치 재개를 꿈꾸던 이완구 전 총리는 최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총리 잔혹사를 끊어낼 정치인으로는 이 전 총리와 황교안(44대) 자유한국당 대표만이 남았다. 황 전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국무총리를 지냈다. 전직 총리 대결인 ‘이낙연 vs 황교안’의 종로 대첩은 4·15 총선의 최대 빅매치로 꼽힌다. 다만 한국당 내부에선 황 대표 출마 지역구로 종로와 함께 양천갑(황희)과 용산, 영등포을(신경민), 구로갑(이인영·이상 민주당 의원) 등이 거론되고 있다.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 지역구인 용산은 친문(친문재인)계인 권혁기 전 청와대 춘추관장이 출마 채비를 마쳤다. 한국당의 ‘황교안 활용법’은 험지에 출마(명분)하더라도 이기는 곳(실익)에 나간다는 전략에 방점을 찍었다. 황 대표의 출마 1순위는 양천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이 전 총리는 한국당의 새로운 후보와 경합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험지 출마를 요구받는 홍준표 전 한국당 대표도 1월 28일 페이스북에 “황 대표가 종로를 회피하는데 이때 종로 출마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도 있다”고 말했다. 황 대표의 방향 전환설과 맞물려 한국당 내부에선 “차라리 신인 후보를 내세우자”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른바 ‘손수조 효과’를 노리겠다는 것이다. 박근혜 키즈였던 손 전 후보는 2012년 총선 당시 부산 사상구에 출마, 문 대통령과 맞붙었다.
문 대통령(55%)이 손 전 후보(43.8%)를 11.2%포인트 차로 이겼지만, 사상구는 19대 총선 내내 주목을 받았다. 차기 대권 주자였던 문 대통령으로선 신인 후보를 이겨도 본전인 게임이었다. 여론조사에서도 압도적인 격차를 벌리지 못하자, 문 대통령은 전국 유세보다는 사상 유세에 집중했다. 권역별 상임위원장을 맡은 이 전 총리가 전국을 못 다니게 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얘기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라도 선거 승리 전에는 ‘정치적 어음 상태’에 불과하다”며 “약속 형태인 어음을 실제 권력을 나눠줄 수 있는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느냐는 이 전 총리의 몫”이라고 전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