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연출한 우민호 감독의 궁금증은 거기서 시작됐다. 감독의 호기심에 관객도 부응하고 있다. 1월 22일 개봉한 영화는 설 명절 동안 300만 관객을 돌파했고, 연휴가 끝난 뒤에도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해 400만 명에 다다랐다. ‘남산의 부장들’은 그렇게 2020년 첫 번째 흥행작으로 등극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2020년 첫 번째 흥행작으로 등극했다. 사진은 제작보고회 당시 배우 곽도원, 이병헌, 이희준과 우민호 감독의 모습이다. 사진=고성준 기자
‘남산의 부장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10·26 사건과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 40일 동안의 이야기를 되짚는 영화다. 1960~1970년대 공포정치의 산실로 통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수장이자, 대통령을 잇는 권력의 2인자로 군림한 중정부장들의 이야기다.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충성경쟁을 벌인 차지철 경호실장, 이들보다 먼저 권력을 누리다가 프랑스 파리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김형욱 중정부장이 주인공이다.
여전히 역사적인 평가가 진행 중인 사건과 인물들을 다루면서도 “해석과 판단은 온전히 관객에게 맡기려 했다”는 우민호 감독을 만나 ‘남산의 부장들’에 얽힌 뒷이야기를 들었다. 잘 알려진 실화사건, 실존인물을 영화로 옮기는 작업은 그만큼 섬세하고 신중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감독은 “강박적으로, 모든 걸 갈아 넣었다”고 말했다.
우민호 감독은 “‘남산의 부장들’ 역시 사건의 이면, 베일에 가려진 사람들의 이면을 파헤치는 영화”라며 “실명을 쓰지 않아야 10·26사건에 대해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다른 느낌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쇼박스 제공
‘남산의 부장들’의 영화화 작업이 본격 시작된 건 2016년부터다. 우민호 감독이 2015년 영화 ‘내부자들’을 통해 청소년관람불가의 한국영화로는 최고 흥행(900만 관객)을 기록한 직후다.
사실 ‘남산의 부장들’은 영화보다 책으로 먼저 유명세를 얻은 작품이다. 1990년대 중반 출간된 동명 베스트셀러는 국내와 일본에서 당시 56만 부가 팔릴 만큼 인기를 얻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충식 작가는 ‘중앙정보부를 빼고서 한국 근현대사를 논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당시 기자로 몸담은 한 일간지에 중앙정보부장들을 통해 현대사를 파헤치는 취재기를 연재해 크게 화제를 모았다. 이를 묶은 책을 군 복무 직후인 1996년 접한 우민호 감독은 “큰 충격을 받아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고 돌이켰다.
원작은 중앙정보부의 역사를 통틀어 다루지만 영화는 10·26사건을 중심에 둔다. 인물과 이야기를 재구성해야 하는 녹록지 않은 과제 앞에서 우민호 감독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주요 인물들을 실명으로 등장시키지 않았다. 허구의 이름을 부여한 데는 이유가 있다.
“실제로 벌어진 큰 사건(10·26)을 갖고 왔지만 영화가 그 역사에만 갇혀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영화적인 상상과 장치들을 발휘해서 역사의 벽을 넘어 확장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관객이 보지 못한 해석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설계 아래 ‘남산의 부장들’을 이끄는 주축인 네 명의 인물은 실명 대신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대통령에게 충성심을 보이는 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김규평(이병헌 분)으로,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미국 청문회장에 나가 대통령을 비판하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박용각(곽도원 분)으로 바뀌었다. 비서실장 차지철은 곽상천(이희준 분)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18년간 절대 권력을 누린 박정희 대통령은 그저 각하(이성민 분)로 표현될 뿐이다.
새롭게 얻은 이름 안에서 배우들은 마치 기계로 짜낸 듯한 섬세하고 정교한 연기로 당대 인물들을 표현한다. 특히 이병헌은 눈 밑의 미세한 떨림, 방향을 잃은 눈동자의 흔들림으로 인물의 심리를 극대화한다.
우민호 감독은 “앞서 ‘내부자들’ 때도 그랬지만 신문 기사로 나오는 내용의 이면을 파헤치고 싶었다”고 했다. “‘남산의 부장들’ 역시 사건의 이면, 베일에 가린 사람들의 이면을 파헤치는 영화”라는 그는 “실명을 쓰지 않아야 10·26사건에 대해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다른 느낌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사건의 재구성…빼고 줄이고 붙이고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가 주도한 10·26사건과 더불어 김형욱의 파리 실종사건도 중요하게 다룬다. 이들 사건을 담기 위해서는 1976년 미국에서 먼저 벌어진 한·미 간 외교마찰 사건인 이른바 ‘코리아게이트’까지 짚어야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코리아게이트는 도입부에 짧게 등장할 뿐이다. 3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영화를 만들기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과감하게 자르고, 시간 순서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영화를 기획할 땐 10·26사건과 파리 실종사건을 각각의 별개 사건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불과 20여 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두 사건에는 중앙정보부장이 깊이 개입돼 있다. 파리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각하를 위한 ‘충성’이 불과 20일 만에 ‘총성’으로 바뀐다.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호기심이 생겼었다.”
김재규와 김형욱은 선후배 사이지만 이들을 연기한 김규평(이병헌 분)과 박용각(곽도원 분)은 친구 사이로 설정돼 있다. 우상호 감독은 “1인자에 쓰임당하다가 버려지는, 같은 운명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사진=영화 ‘남산의 부장들’ 홍보 스틸 컷
영화에는 이병헌이 연기한 김규평과 곽도원이 맡은 박용각이 친구 사이로 설정돼 있다. 실제로는 다르다. 군인 출신으로 5·16 군사 쿠데타의 일원인 김재규와 김형욱은 친구가 아닌 선후배 사이다. 그런데도 굳이 친구로 설정한 이유에 감독은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닌, 중앙정보부장이라는 같은 사람으로 보이길 바랐다”고 답했다.
“1인자에 쓰임당하다가 버려지는, 같은 운명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렇게 설정했지만 장면마다 섬세하게 그리려고 했다. 지금은 망자가 된, 역사의 인물들을 영화로 불러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볼 때 마치 앞서 떠난 사람들의 초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
‘남산의 부장들’은 근현대사를 다룬 시대극 가운데 새로운 이정표를 남기는 영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무엇보다 오랜 군사 독재를 끝내려고 울린 총성이 결국 또 다른 군사 정권을 낳았다는 메시지가 남기는 울림이 크다. 우민호 감독은 “역사가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덧붙였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