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1월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더케이타워에서 열린 자서전 ‘당랑의 꿈’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끝내며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홍준표 전 대표는 1월 15일 21대 총선 출사표를 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에 던졌다. 태어난 고향(창녕)과 자란 고향(대구) 중에 출마를 저울질해오던 그는 결국 TK(대구·경북)보다 PK를 택했다. 15대 총선 서울 송파갑에서 첫 배지를 단 이후, 16대부터 18대까지 서울 동대문을에서 3선을 지낸 그가 수도권을 떠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험지를 떠나 보수 텃밭을 택한 셈이다.
대권주자를 향해 수도권 험지 출마를 공식 요구한 한국당 지도부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습이다. 황교안 대표는 홍 전 대표 출마 선언과 관련 “우리 당의 원로, 중진들이 힘들고 어려운 곳에 가서 본을 보여야 한다”고 언급했다. 황 대표 한 측근은 “홍 전 대표를 향해 여러 경로로 수도권 출마를 권유했는데, 끝내 안 통했다. PK 출마를 고집한다면 컷오프는 불가피하다. 가만 놔뒀다간 험지 출마 원칙이 깨지고, 전체 대오가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반영하듯 1월 29일 열린 제3차 당 공천관리위원회 회의에서는 홍 전 대표 사례가 도마 위에 오른 것으로 전해졌다. 김형오 공관위원장은 “그분들(당 대표를 지낸 분들)이 (공천) 신청하는 걸 보고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홍 전 대표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그는 “자유를 부르짖는 한국당에서 당원의 출마 지역 선택 자유를 제한할 아무런 헌법적 근거도 없고 정치적 이유도 없다”고 날을 세웠다. 홍 전 대표 논리는 컷오프는 현역이 대상일 뿐, 현재 원외 인사이자 평당원인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간 험지에서 싸웠으니 이젠 ‘후방’을 지킬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최근 밀양 삼문동 아파트로 주거지로 옮기는 등 당의 경고를 무시하고 본격적인 총선 준비에 나섰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1월 30일 오후 열린 ‘당랑의 꿈’ 출판기념회에서 어린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둘째는 ‘PK 맹주’를 향한 노림수다. 그의 시선은 총선을 넘어 2022년 대선으로 향해 있다. 홍 전 대표 측 한 관계자는 “각 권역별로 선거를 이끌 사람이 필요한데, PK는 마땅한 축이 없다. 이곳 표심을 다지는 것이 대권을 향한 발판”이라고 말했다.
한때 맹주였던 김무성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했다. PK 요충지인 부산에서만 한국당 의원 5명이 줄줄이 불출마를 한 상태다. 홍 전 대표 역시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PK는 840만 명이 거주하는 핵심적인 전략 지역”이라며 “부·울·경 표심이 정권 향방을 결정한다”고 공개적으로 강조하기도 했다. 수도권에서 여당에 다소 밀리더라도, PK‧TK를 확실히 먹고 가면 과반 확보가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이런 홍 전 대표 구상에 있어 변수는 ‘보수 통합’ 성사 여부다. 통합신당이 출범하면 공천 판이 전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당이 통합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보수당, 이 밖에 이언주 의원이 이끄는 전진당, 중도보수 시민단체 등은 통합신당에서 공천관리위원회를 새로 꾸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홍 전 대표는 특히 한국당과 새보수당 간의 통합 협상에 대해 독설을 날리고 있다. 현재 두 당은 통합 협의체를 구성해 양당 간 통합을 논의 중이다. 홍 전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당과 유승민당(새보수당)만 선거 연대를 하게 되면 그것은 통합이 아니라 야합에 불과하다”라고 깎아내렸다. 또 황 대표를 향해 “마치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 여태껏 놀다가 허겁지겁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것처럼 유승민당과의 소통합에 몰두하는 모습은 바람직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역풍만 초래할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한국당과 새보수당 간 통합이 이뤄질 경우 대권주자들의 험지 출마 요구는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다. 당장 대구 출마를 선언했던 새보수당 유승민 의원이 중도 포섭을 위해 수도권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라이벌인 황 대표 역시 험지 출마가 불가피하다. 홍 전 대표가 후방을 계속 고집할 경우 따가운 시선이 더욱 강해지며 ‘면’이 서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통합을 통해 보수 야권이 좋은 총선 성적표를 받았을 경우 홍 전 대표 앞날은 험난할 가능성이 높다. 공천을 받아 PK에서 당선되면 관계가 없지만,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될 경우 향후 ‘복당’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경선 탈락에 불복해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은 ‘해당행위’로 규정돼 복당이 불허된다. 만약 야권이 총선에서 대패해 어려운 상황이라면 복당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가능성이 높지만, 승리한다면 복당은 곤란해질 수 있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30일 오후에 열린 ‘당랑의 꿈’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끝내고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홍 전 대표의 PK 출마 등 독자노선이 ‘태풍’을 일으킬지, ‘미풍’에 그칠지는 이렇듯 통합 변수, 보수야권의 총선 결과 등이 작용하고 있다. 이를 좀 더 면밀히 봤을 때는 보수 야권이 자중지란에 휩싸일수록 홍 전 대표 영향력이 커진다는 아이러니한 방정식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치권 입문 후 줄곧 비주류를 자처했던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주류인 친박계의 붕괴 후 치러진 19대 대선에서 비로소 후보가 됐다. 이후 2등을 차지해 무너진 보수를 그나마 살려냈다는 평을 얻으며 대권주자로서 가능성을 보였다. 기세를 몰아 지난해 치러진 2‧27 전당대회에 도전해 당권을 쥐려고 했으나 재건된 친박계가 옹립한 황교안 후보가 나서자 출마를 접었다.
홍 전 대표는 당내 ‘내부총질’이라는 지적에 관계없이 황 대표 등 지도부를 끊임없이 비판해왔다. 나경원 전 원내대표를 향해선 대여 투쟁에서 번번이 패했다며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범여권이 주도한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이 통과하자 “야당의 존재 가치가 없다면 오늘밤이라도 모두 한강으로 가거라”며 맹비난했다. 최근에는 황 대표를 향해 “모두 내려놓으라”며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거듭 촉구하기도 했다.
한국당 한 핵심 관계자는 “애초 나경원 전 원내대표 사퇴를 촉구한 것은 황 대표를 흔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황 대표가 물러나는 상황이 되어야 구원투수 격으로 홍 전 대표에게 역할이 돌아오는 것”이라며 “총선에서 패해 황 대표 책임론이 일게 될 경우 홍 전 대표에게 유리한 구도가 조성될 수 있다. 현재 보수진영에 마땅한 주자가 없는 상황도 작용한다”고 말했다.
권준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