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직한 후보’ 속 라미란은 ‘라미란이었기에 가능한’ 주상숙으로서의 열연을 펼쳤다. 사진=NEW 제공
“감독님께서 주상숙이란 역할을 주시면서 ‘네가 아니면 안 돼’라는 강박을 심어주셨어요. 거의 세뇌 수준이었죠. 그런데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건 제가 생각해도 쉽진 않더라고요. 이렇게 모든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이런 느낌으로(웃음).”
동명의 브라질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정직한 후보’에서 라미란은 허풍 공약을 내세우며 4선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천벌로 인해 ‘진실의 주둥이’가 열린 국회의원 주상숙 역을 맡았다. 앞서 ‘걸캅스’ ‘내 안의 그놈’ 등으로 코믹 연기 실력을 뽐낸 그였지만 단일 코미디 장르로는 첫 도전이었다고 했다.
“그동안은 좀 소심한 코미디를 했거든요. 코미디라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도망갈 데가 있는 작품인 거죠. (코미디를 찍고 있지만) ‘저는 진지합니다’라는 콘셉트를 내세웠다면 이번에는 진짜 ‘그냥 웃자고 하는 거야’ ‘한번 웃어 보자’ 그런 마음을 먹고 했어요. 한편으로는 코미디 장르가 참 어려운 게, 어느 신에서 누가 어떻게 웃을지 모르니까 모든 지점을 최대한 살려야 했거든요. 어떨 땐 ‘이렇게 해도 되나’ ‘어떻게 해야 연기를 억지스럽지 않고 말이 되게 할까’ 하면서 고민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과하게 느껴지지 않은 건 아마 라미란이기 때문이 아닐까요(웃음).”
대중들은 라미란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라미란 여사’로 가장 먼저 떠올릴지 모른다. 연하 남편과 두 아들을 한 손으로 휘어잡는 여장부 스타일의 그 모습은 이후 다른 작품 속 라미란의 캐릭터에도 은근히 묻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첫 영화 데뷔작이었던 ‘친절한 금자씨’ 속 강렬한 교도소 신을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은 그야말로 변신 그 이상의 변신이다.
“사실 저는 그전부터 (연극) 무대를 할 때도 감초 같은 역할을 자주 맡았었거든요. 그런데 영화 쪽은 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서 잘 모르잖아요. 그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저를 이전의 이미지로 안 봐주시고 시크하게 봐주시는 게(웃음).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얼마 못 가더라고요(웃음)….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들하고 지금처럼 막 농담하고 그러니까 어느 순간부터 ‘어, 저 언니 되게 재미있는 사람이다’ 해서 다음에 코믹 작품을 할 때 저를 불러주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제가 코믹 캐릭터 제의를 많이 받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실생활에서 저를 보시는 분들은 다 의외라고 그래요. 왜 그렇게 조용하냐고. 언제는 한번 식당에 갔는데 식당 사장님이 저를 보면서 ‘밥을 왜 그렇게 조용히 먹어?’ 하시는 거예요(웃음).”
영화인들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다양한 역할이 나와야 한다고 소신을 밝힌 배우 라미란. 사진=NEW 제공
“캐스팅 자체가 되게 재미있었어요. 김무열 씨 같은 경우도 ‘김무열 씨가 코미디를 한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고. 경호 씨는 이제까지 거친 역을 많이 했었잖아요.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되게 능글맞고 허세가 잔뜩 있는 캐릭터로 나오는 모습이 참 재밌더라고요. 만일 반대였다면 좀 이상했겠죠? 무열 씨가 남편이고, 경호 씨가 보좌관이고 그랬으면… 아닌가, 재밌었으려나(웃음). 현장에서도 저희가 많은 시간 같이 있다 보니까 같이 밥을 또 많이 먹었는데, 원래는 경호 씨가 처음 촬영하기 전에 몸무게를 6kg 정도 뺐대요. 그런데 계속 먹으니까 점점 살이 쪄서 나중엔 옷이 안 맞는 거예요. 그런데 저도 살 쪄서 후반부에는 바지가 한 벌 터졌어요(웃음).”
라미란은 이처럼 연하와 합이 잘 맞는 배우이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함께 로맨틱한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이 박성웅(내 안의 그놈)을 제외하면 대부분 연하였던 상황. 남자 배우들도 띠동갑 나이차를 넘어서 로맨스 코미디를 찍고 있는데 라미란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 작품에서 김무열의 출연을 듣고 그 역시 감독에게 ‘로맨스’를 요청했다. 결과는, ‘와장창’이었지만.
“건의 드렸죠, 드렸는데 그렇게 ‘와장창’…. 존경하는 누나여서 보좌관하는 거라고 선 긋기를 너무 확실히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2탄에선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웃음). 연하 배우와 대놓고 로맨스, 저도 하고 싶죠, 아, (내 안의 그놈 때) 진영 씨요? 진영 씨는 박성웅 오빠인 거잖아요, 껍데기만 진영이지(웃음). 제가 수년 동안 연하남 상대역을 모집했는데 아무도 응하지 않으시더라고요. 항상 모집 중인데…. 처음엔 20대였으면 좋겠다고 그랬는데 이제는 점점 나이대가 올라가요. 저도 양심이 있지… 나중에 기사에 써주세요, ‘라미란에게 이런 연하남은 어떨까’ 투표 받을 수 있게(웃음).”
영화 ‘정직한 후보’ 스틸컷. 사진=NEW 제공
농담과 진담이 오가는 인터뷰에서 슬쩍 언급되긴 했지만 라미란이라는 존재는 실제로 영화계에서, 특히 다른 여성 배우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처럼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라미란의 발자취를 보며 그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는 후배 여배우들도 있을 터다. 40대 중년 여성 배우의 코미디 단일 장르로 원톱 주연 자리에 오른 그에게는 어느덧 ‘코미디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정작 본인은 “장인 아니고 장모인 것 같은데”라면서도 “그래도 붙여줄 때 잘 달고 있다가, 나중에 다른 분이 또 가져가시게 할 것”이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코미디로 중년 여성 배우의 주연이 잘 없었던 것 같아요. 보통 무겁거나 모성애를 그린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죠. 제가 이런 자리에 오른 데에 대해 저를 바라보는 후배 배우들에게 책임을 지겠다, 뭐 이런 건 아니고요(웃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시도들이 있었고, 이후에도 그런 시도를 하게 된다면 제가 할 바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잘 돼 가지고 또 다른 시도들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사실 작품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나와야 하는 거지 남성 캐릭터를 여성으로만 바꾼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배우들이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잘 살아나는, 그런 작품들이 많이 나와야 그게 더 의미 있는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