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교수에게 연락을 했던 기업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어쩔 수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복수의 회사가 특정 인사들에게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연락을 할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라는 것. 대기업 B사 IR팀 관계자는 “팀원들뿐만 아니라 임원들까지 나서서 사외이사를 찾아다녔다”며 “공식적인 자리, 사석 가릴 것 없이 ‘추천해달라’는 말을 했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의 주주총회 전경으로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계 없다. 사진=최준필 기자
#“괜찮은 사외이사 어디 없나요?”
최근 기업들 사이에선 ‘사외이사 구인’이 뜨거운 감자다. 기업 입장에선 ‘대란’이고, 교수나 전직 공직자들 입장에선 ‘큰 장’이 섰다. 지난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상법 시행령 개정안 때문이다. 개정안은 한 회사에서 사외이사가 ‘기한 없이’ 재직이 가능하던 것을 6년 이상 재직하면 연임을 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계열사에서 각각 재직한 기간을 더하면 9년까지 규제한다. 당초 정부 안팎과 재계에선 ‘1년 유예설’이 나왔으나, 2월 1일부터 시행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됐다.
상법 개정안이 본격 시행되면서 기업들은 당장 오는 3월 주주총회 시즌에 맞춰 동시에 사외이사를 교체해야 한다. 상장사는 이사회 결의를 거쳐 주총 2주일 전까지 사외이사 선임안을 포함한 주총 소집 안건을 공시해야 한다. 일정을 맞추려면 기업들은 ‘늦어도’ 2월 중순까지는 사외이사 후보를 추리고 검증까지 끝마쳐야 한다. 이미 설 연휴로 시간을 보낸 탓에 쓸 수 있는 시간은 더 적다.
상장협의회의 집계에 따르면 오는 3월 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 임기제한으로 교체해야 하는 상장사는 총 566개사 718명이다. 대기업집단의 소속 기업은 72곳, 103명이었다. 총 566개사 가운데 116곳은 사외이사를 2명 이상 교체해야 하고, 3명 이상 교체되는 곳은 29개사다.
일요신문이 별도로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통해 분석한 결과(지난해 3분기 보고서 기준), 셀트리온은 사외이사 6명 전원이 교체 대상이다. 2013년 4명, 2014년 2명을 선임해 모두 재직기간 6년이 넘었다. 삼성은 6개 계열사가 총 13명의 사외이사를 바꿔야 한다. 특히 삼성SDI는 4명의 사외이사 전원을 교체하고, 삼성전기는 전체 사외이사 4명 가운데 2명을 새로 선임해야 한다. LG, SK텔레콤, 현대건설, LS, 안랩 등도 사정은 비슷했다.
문제는 교체해야 하는 사외이사의 ‘숫자’뿐만이 아니다. 회사 주요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사외이사들이 줄줄이 떠나야 한다. KT의 경우 김종구 의장과 장석권 이사가 물러날 예정이다. 김종구 의장은 법무부 장관 출신 법률 전문가로, 장석권 이사는 재무 전문가로 일했다. 두 사람은 최근 구현모 KT 차기 CEO(최고경영자) 선출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네이버는 인수·합병(M&A), 자본시장과 기업금융 등에서 조력했던 정의종 태평양 파트너 변호사 등을 내보내야 한다. 셀트리온의 교체되는 사외이사 6명과 SK하이닉스 사외이사도 회사 의사결정에 큰 역할을 했다. C 기업 관계자는 “회사와 6년 이상 손발을 맞춰 온 사외이사들인 만큼 누가 오더라도 빈자리가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거수기’ 논란 해소 위해서라지만
기업들은 사외이사 구인난이 심각하다고 호소한다. 여러 회사가 똑같은 시기에 비슷한 인재풀에서 사외이사를 찾게 될 수밖에 없어서다. C 기업 관계자는 “어렵게 추천을 받아 접촉했는데 ‘OO기업에서 먼저 연락을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허탈하다”고 말했다.
중견·중소기업 사정은 더 어렵다. 새로운 사외이사를 찾으려고 해도 오겠다는 사람이 없다. D 회사 관계자는 “대기업들은 회사 내부에 별도의 인재풀이나 추천 제도가 있고, 보수도 많아 사외이사를 새로 뽑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중견·중소기업들은 온다는 사람이 없다. 보수를 올리려 해도 회사 여건상 이마저도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낙하산 시비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대학 교수나 전직 공직자들을 중심으로 사외이사 제안이 몰리고 있는데, 최근 구인대란의 틈을 타 전문성이 부족한 정치권 인사가 내려올 수 있다는 것. 한 공기업 관계자는 “특히 공기업이 취약하다. 지배주주격인 정부 쪽 사람이 한 명만 내려와도 논란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상법 개정을 계기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생겼다”고 말했다.
사외이사와 더불어 올해는 임기 3년인 감사, 또는 감사위원들도 큰 폭으로 교체된다. 2017년 말 섀도보팅(Shadow Voting·의결권 대리행사) 폐지를 앞두고 상장사들이 감사위원을 일제히 선임했다. 상장회사들은 사외이사와 더불어 감사 선임 후보도 찾아야 하는 셈이다. 일부 기업들은 사외이사보다 감사 선임에 더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전해진다. E 기업 관계자는 “개정안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올해 주총을 잘 치를 수 있을지 걱정이 크다. 업계에선 주총 앞두고 사외이사와 감사 선임에 실패하는 곳이 나올 것이라는 말도 파다하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불만이 적지 않음에도 이번 상법 시행령이 추진된 이유는 ‘거수기’ 논란 탓이다. 사외이사 제도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금융 구제와 함께 경영진에 대한 견제를 본격화하기 위해 도입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 오너 등 최대주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지 못하면서 유명무실해졌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왔다. 실제 공정거래위원회가 2019년 12월 공시 대상 대기업집단의 250개 상장사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2018년 5월 이후 1년간 이들 회사의 이사회 안건 6722개 중 부결된 건은 단 3건이었다. 99% 이상이 ‘원안대로’ 통과 된 것이다.
이 거수기 논란의 배경으로 회사 오너 등 최대주주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사를 사외이사에 앉힌다는 지적과 함께 사외이사 임기의 지나친 장기화가 꼽혔다. 전문성과 독립성을 담보한다는 취지로 사외이사 후보자로 선임된 경우에는 직무수행계획서를 제출해야 하는 규정도 새로 만들어졌다. 계획서에는 전문성과 독립성을 기초로 직무를 수행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 기존 약력 대신 세부 경력사항을 쓰고 경력과 직무수행계획서가 사실과 일치한다는 확인과 서명도 하도록 했다.
이 법안을 추진한 한 정부 관계자는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사외이사 임기 제한을 통해 최소한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실질적인 견제를 위한 전문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이 사외이사를 한 번에 교체해야 하는 것에 대해선 “회사 사외이사 제도나 구조가 큰 틀에서 흔들리는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곳은 없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거래소는 지난 2월 6일 상장사들이 사외이사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한 이번 상법 개정안을 어기면 관리종목 지정이나 상장폐지 사유에 해당할 수 있다고 밝혔다. 거래소 관계자는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상장법인은 상법 및 거래소 상장규정에 의거해 사외이사·감사(자산총액 2조 원 이상의 경우 감사위원회)를 둬야 하며 미충족 시 관리종목 지정 등 시장조치 대상이라 상장사들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차원”이라며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도 주총 성립을 위해 노력한 사실을 상장사가 소명하고 거래소가 이를 인정하면 관리종목 지정에서 예외로 둘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