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직한 후보’로 데뷔 첫 코미디 장르에 도전한 김무열은 결국 ‘인생 개그 캐릭터’를 완성해 냈다. 사진=NEW 제공
김무열에게 ‘라미란’이라는 이름이 몇 번 나오는지 세어 보는 것도 이 인터뷰의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그만큼 오는 12일 개봉하는 영화 ‘정직한 후보’를 통해 만난 라미란이 그에게 큰 존재가 됐다는 이야기다. 극중에서 김무열은 ‘진실의 주둥이’가 열려 거짓말을 못하게 된 3선 국회의원 주상숙(라미란 분)의 보좌관 박희철 역을 맡아 작품 안팎으로 그를 보좌했다.
“사실 제가 캐스팅되는 과정에서 대본이 조금 수정돼서 제 역할이 늘어났더라고요. 그래서 회의를 해서 다시 다 줄이는 방향으로 재수정했죠. 이 작품은 주상숙이 큰 줄기로 곧게 뻗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어떤 캐릭터로서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라는 것보다는 이 안에서 내 역할을 잘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연기했어요. 현장에서 미란이 누나가 저희를 잘 챙겨주시는데, 밤샘 촬영이 있으면 촬영하기 전부터 저희한테 ‘오늘 뭐 먹을까’ 물어 보세요(웃음). 근데 누나가 결정장애가 있거든요. 중식 먹자고 해놓고 식당 다 알아 놓으면 나중엔 ‘부대낄 것 같다’고 싫대요. 그렇게 몇 번 하고 나니까 나중엔 뭐 먹고 싶냐고 물어봐도 못 들은 척하고 그냥 있는 것 먹자고 했죠. 근데 그렇게 하면 또 누나가 다 따라 오더라고요. 실제로도 제가 나름 보좌관 역을 했는데, 누나는 아마 모를 거예요. 제가 일을 다 해결할 때까지 가만히 있으니까(웃음).”
‘김무열과 라미란이 코미디 영화를 찍는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대중 사이에서는 “로맨스도 나오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은근히 감돌기도 했다. 물론 주연 배우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절당하긴 했지만, 라미란은 직접 감독에게 요청해보기도 했다고. 그런데 김무열 역시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배우 김무열은 코미디로만 흐를 수 있는 영화의 무게 추로 자신의 역할을 정의했다. 사진=NEW 제공
주상숙과 로맨스는 안타깝게도 그저 국회의원과 열혈 보좌관의 관계로 끝나지만, 김무열이 맡은 박희철의 캐릭터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시 못 할 존재감을 뽐낸다. 선거사무실의 브레인으로 철두철미하게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보이면서도, 허당기 넘치는 허술한 모습까지 갖춘 그의 모습은 “김무열도 개그 캐릭터를 할 수 있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하다.
“처음에 제가 이 작품을 선택하겠다고 하니까 다들 반응이 딱 두 가지였어요. ‘갑자기?’ ‘김무열이 왜?’ 이게 무한 반복이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저는 촬영하면서 정말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촬영할 때마다 너무 웃겨서 카메라를 피해 웃음을 참는 게 고역이었어요. 이번에 박희철 역을 하면서 다이어트를 하거나 신체적으로 어떤 걸 보여드리고자 한 건 없었는데 감독님이 어려운 주문을 하시더라고요. 멋있었으면 좋겠대요(웃음). ‘워커 섹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데 ‘나도 일을 하긴 하는데, 일하면서 섹시한 게 뭐지?’ 싶었어요. 나중에 들으니까 셔츠를 입은 남자가 일을 할 때 더워서 소매를 걷었는데, 팔목에 갈라진 근육 뭐 그런 거래요(웃음).”
외적으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곤 하지만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보좌관의 역할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천벌이 내려 ‘진실의 주둥이’가 열려 버린 국회의원이라는 판타지적 상황에서 한없이 코미디로만 흐를 수 있는 이야기의 중심을 잡는 것 역시 김무열이 맡은 박희철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김무열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무게 추”라고 정의했다.
“코미디 안에서 어느 정도 중심을 지키고, 무게 추 역할을 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판타지적 설정을 가져가는 코미디다 보니 누군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로 코미디로만 흘러가게 되니까요. 누군가는 어딘가로 흘러버린 걸 다시 되돌리고 그 중심에 서야 하는 거죠. 파란색 정장을 입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너무 어두워서 올드하지도, 또 너무 밝아서 가볍지도 않은 딱 중도의 느낌. 그런 부분에 중점을 두었던 것 같아요.”
영화 ‘정직한 후보’ 스틸컷. 사진=NEW 제공
40대를 목전에 두고 있는 김무열은 올해로 연기 데뷔 18주년을 맞는다. ‘정직한 후보’에 이어 3월에는 ‘침입자’ 개봉을 앞두고 있다. 여기에 더해 2020년 개봉이나 촬영이 예정된 작품이 공개된 것만 3건이다. 지난해 ‘악인전’으로 데뷔 17년 만에 처음으로 칸 영화제까지 입성해 배우 인생의 절정기를 찍었던 그는, 어린 시절 그가 바랐던 모습과 가까워졌을까.
“벌써 18년이나 됐나 싶죠.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른지, 지나면 지날수록 야속하게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지금도 시간이 참 빨리 가네요, 인터뷰 시간 5분 남았는데(웃음). 한편으로는 그동안 내가 뭘 했을까 싶어요. 개인적으로 제가 이루고자 했던 게 있었을 텐데, 제가 어릴 때 상상한 30대 김무열의 모습, 40대 김무열의 모습에 얼마나 가까워지고 또 멀어졌는지. 오히려 더 철이 없어지는 것 같고 자꾸 모자란 부분만 보여요. 그 정도의 시간을 산 배우라기에는 참 부끄럽죠. 그 시간에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려고 합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