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미국 LA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만난 외신 기자들 중 적잖은 이들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기생충’은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과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거머쥐었다. 앞서 만났던 기자 가운데 모든 시상식이 끝난 뒤 다시 마주친 중국 기자는 이렇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제 말이 맞았죠? ‘기생충’은 최고의 작품입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처음으로 후보를 낸 국가의 작품이 작품상을 받은 것은 ‘기생충’이 최초다. 물론 국제장편영화상 수상작이 작품상의 주인공이 된 것도 처음이다. 그리고 한국 기자단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취재하기 위해 대규모로 출장을 간 것도 유례없는 일이다. 이처럼 ‘기생충’의 아카데미 후보 선정부터 작품상 수상까지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전인미답의 고지로 이어졌다.
미국 현지 시각으로 2월 9일 LA 할리우드 돌비극장(Dolby Theater)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한국영화 최초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사진=A.M.P.A.S.®
#“아카데미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한국 기자단은 외신 기자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동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 한 번도 한국 영화가 후보에 오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곳에 취재 올 일도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기생충’이 이번 아카데미에서는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영화였기 때문에 시상식 전 외신 기자들이 한국 기자들에게 ‘기생충’의 의미와 한국에서의 반응 등을 캐묻기도 했다. 또한 작품상을 받은 직후에는 한국 기자단의 주변에 있던 외국 기자들이 “축하한다”며 인사와 악수를 건넸다.
아카데미 시상식 취재 승인을 밟는 절차는 꽤 까다로웠다. 실제로 적잖은 매체들이 취재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현장에서 취재증 발급을 담당하던 직원은 “‘기생충’의 나라에서 왔냐?”고 물은 뒤 “아카데미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기생충’은 단순히 아카데미의 부름을 받은 초청작이 아니라 올해 아카데미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깃발을 꽂은 정복자가 됐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이라는 작품으로도 높은 관심을 끌었지만 무대에 오를 때마다 내뱉는 소감 한 마디, 한 마디도 화제를 모았다. 사진=A.M.P.A.S.®
#봉준호의 유머와 예의
외신 기자들의 관심사는 단연 봉준호 감독이었다. 봉 감독이 빚은 ‘기생충’이라는 작품에 대한 관심도 높았지만, 무대에 오를 때마다 그가 내뱉는 소감 한마디 한마디가 화제를 모았다. 영화야말로 모든 문화권을 초월해 함께 즐길 수 있는 콘텐츠라는 것을 강조해왔던 봉 감독은 평소에도 언어, 민족, 인종, 문화의 장벽을 넘어 누구나 곱씹고 즐길 수 있는 농담을 건넸다.
이번 아카데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제장편영화상 수상 후 기쁨을 만끽하며 “오늘 밤 술을 마실 준비가 됐다”고 말하자 객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감독상 수상 직후에는 믿기지 않는 듯 입을 가리고 헛웃음을 짓던 그는 “조금 전에 국제장편영화상을 받고 ‘오늘 할 일은 끝났구나’ 싶었다”고 말해 객석을 예열시킨 뒤 “내일 아침까지 술을 마실 거다”라고 재차 너스레를 떨어 박수와 찬사를 받았다.
또한 마틴 스코세이지(아이리시맨), 샘 멘더스(1917), 쿠엔틴 타란티노(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 토드 필립스(조커) 등 내로라하는 감독들과 경쟁한 그는 “오스카 측에서 허락한다면 텍사스 전기톱으로 이 트로피를 5개로 나눠서 토드와 샘, 쿠엔틴 등과 나눠 갖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명 할리우드 영화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의 제목을 패러디한 이 소감에 고배를 마신 동료 감독들도 아쉬움을 뒤로하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외신은 봉 감독의 예의에도 주목했다. 감독상을 받으러 무대에 오른 그는 “제가 어릴 때 가슴에 새긴 말이 있는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마틴 스코세이지”라며 노장이자 거장 감독인 마틴 스코세이지를 가리켰다. 일순간 돌비극장 안의 모든 배우와 감독, 제작자들이 기립해 봉준호와 마틴 스코세이지를 향해 찬사를 보냈다. 이런 봉 감독의 유머와 예의에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그의 성과를 치하했다.
외신들은 ‘기생충’의 4관왕 등극에 의구심을 품고 질투하기 보다는 “공정한 심사였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진 제공=A.M.P.A.S.®
#이견 없는 수상, 아카데미의 위상도 달라졌다
‘기생충’은 이미 2019년 5월 열린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이미 충분히 작품성을 갖췄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다소 성질이 다른 시상식이다. 미국에서 열리는 이 행사에는 ‘오스카 소 화이트’(Oscar so white)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백인 감독이 만들고 백인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향한 충성도가 강하다. 그래서 한국어 영화인 ‘기생충’이 국제장편영화상은 유력해도 그 외의 상을 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기생충’은 작품상, 국제장편영화상을 포함해 4관왕에 올랐고, 외신들은 의구심을 품고 질투하기보다는 “공정한 심사였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자국의 시상식인 아카데미의 결정을 바라보는 현지 언론의 평가가 눈에 띄었다.
미국 CNN은 “‘기생충’, 역사를 만들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오스카 역사상 처음으로 비영어권 영화가 작품상을 받았다. ‘기생충’이 경쟁작들에 비해 너무나 강력했다”고 평했다. 뉴욕타임스는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은 국제영화에 대한 아카데미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고 적었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아카데미를 비난해온 이들이 요구해온 ‘좀 더 포용력 있는 오스카’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보도했다. AP통신 역시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기생충’이 처음으로 비영어권 영화로서 작품상을 수상했다”며 “세계의 승리(a win for the world)“라고 정의했다. ‘기생충’의 수상을 통해 백인우월주의의 기운이 짙게 뱄던 아카데미 자체의 위상이 상승했다고 본 것이다.
미국 LA=안진용 문화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