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2020년 미국 LA 할리우드 돌비 극장(Dolby Theater)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무려 4번이나 올라갔다. 한국영화 101년, 입봉 20년 만의 성과다. 사진=A.M.P.A.S.®
#교복자율화와 민주화항쟁이 어우러진 고교시절
1983년 중·고등학교 교복이 자율화됐다. 통행금지 해제, 두발에 이어 교복까지 자율화되면서 1980년대 초중반의 중·고등학교에도 자유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런 분위기가 한창인 1985년 봉준호 감독은 서울 잠실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디자인을 전공한 아버지의 서재에서 수많은 관련 외국 서적들을 접하고 만화 등 그림을 그리던 봉준호 감독은 그 시절 AFKN을 통해 할리우드 영화를 접하며 샘 페킨파와 앨프리드 히치콕을 만나게 된다. 중학생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꾼 그는 고교시절 그 꿈을 조금씩 구체화한다. 그림솜씨가 빼어났던 그가 고교시절 시내버스 회수권을 실물과 똑같이 만들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지금도 섬세한 그림으로 현장콘티를 만드는 그의 재능이 이미 그 무렵에 완성된 셈이다.
그가 만든 영화의 구상과 디테일도 몇 개는 이미 고교시절에 완성된다. 잠실고등학교 지하실의 이미지는 훗날 영화 ‘살인의 추억’의 지하 조사실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는 ‘기생충’의 지하실까지 이어진다. 잠실고등학교 인근 잠실대교에서 교각을 타고 오르는 검은 괴물체를 본 뒤 ‘한강에 사는 괴생명체의 존재’를 공상한 것이 훗날 영화 ‘괴물’로 구체화된다.
다만 그 시절이 그리 자유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고교시절을 보낸 1985년에서 1987년은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는 동시에 그는 진지하게 사회의식을 키워가기도 했다. 이런 1980년대의 시대적인 현실은 훗날 봉준호 감독 영화의 철학적인 틀로 자리잡게 된다.
고교시절 잠실대교에서 교각을 타고 오르는 검은 괴물체를 본 뒤 ‘한강에 사는 괴생명체의 존재’를 공상한 것이 훗날 영화 ‘괴물’로 구체화된다. 사진=‘괴물’ 홍보 스틸 컷
#선지원 후시험, 3저 호황…축복받은 88학번
88학번은 당시 대학가에서 축복받은 세대로 꼽혔다. 1987년 민주화항쟁이 끝난 직후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과 3저 호황 등으로 경제 상황도 좋던 시절이다. 게다가 88학년도 전기 입시부터 선지원 후시험 제도가 시행되면서 88학번은 소신 지원이 이뤄진 첫 세대이기도 했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봉준호 감독 역시 사회학과로 소신 지원했다. 그는 영화진흥위원회가 펴낸 한 서적을 통해 “이장호 배창호 감독의 영화를 보며 반드시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영화 전공보다 인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하며 영화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의 대학시절은 대학친구가 참여연대의 ‘월간 참여사회’ 2003년 6월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 글을 작성한 대학친구는 ‘봉준호 특유의 보여주기’ 방식이 대학 시절부터 빛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가 학보 만평으로 학내문제와 정치적 사안을 절묘하게 대비시키는 솜씨를 뽐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89년 여름농활을 추리극 형태로 꾸민 코믹만화 ‘농활야사’가 당시 연세대에서 크게 화제가 됐었다고 한다.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봉준호 감독이 낸 숱한 아이디어가 각종 집회와 선거에 요긴하게 활용됐다고 한다. 늘 그가 품어내는 풍자와 재치는 ‘힘을 주는 아름다움’이었다고 한다.
봉 감독의 대학친구들은 2002년 9월 ‘살인의 추억’에 단역배우로 출연했다. 영화에 20초가량 짧게 등장하는 대학가 화염병 시위 장면이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이 글을 기고한 대학친구는 1990년 초여름 봉준호 감독이 전교조 선생님들 시위에 참여했다가 ‘화염병처벌법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고 밝혔다. 친구들이 당시의 빚을 갚기 위해 군복과 교련복을 입고 화염병을 들고 영화에 출연했던 것이다.
1996년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 연출부로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봉준호 감독은 1997년 ‘모텔 선인장’, 1999년 ‘유령’ 등을 거쳐 2000년 비로소 장편영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선보인다. 사진은 ‘살인의 추억’으로 제40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수상할 당시의 모습. 사진=일요신문DB
1993년 ‘백색인’, 1994년 ‘지리멸렬’ 등의 단편 영화를 만든 봉준호 감독은 ‘지리멸렬’을 본 뒤 먼저 연락을 해온 박찬욱 감독을 만나게 된다. 그의 소개로 이준익 감독을 만나는 등 충무로 인맥을 넓혔단다. 1996년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의 연출부로 들어가며 본격적인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다. 1997년 ‘모텔 선인장’에서 조연출과 각본을 맡았고 1999년에는 ‘유령’의 각본을 맡았다. 그리고 2000년 비로소 장편영화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를 선보인다.
유독 1990년대 후반에 입봉한 감독들 가운데 거장들이 많다. 김기덕(1996년 영화 ‘악어’) 강제규(1996년 ‘은행나무 침대’) 홍상수(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창동(1997년 ‘초록물고기’), 허진호(1997년 ‘8월의 크리스마스’), 김지운(1998년 ‘조용한 가족’), 임상수(1998년 ‘처녀들의 저녁식사’) 등이 대표적이다. 1992년에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입봉했지만 2000년 개봉한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박찬욱 감독도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세계 3대 영화제를 누비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할리우드에 진출한 감독도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입봉한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까지 점령했다.
이처럼 한국 영화계를 이끌 감독들이 이 시기에 대거 쏟아져 나온 계기는 바로 영화 사전검열 폐지다. 1996년에 영화 사전검열이 위헌 결정을 받으며 지금의 등급제가 시작됐다. 2019년 10월에 있었던 한국영상자료원의 ‘금지된 상상, 억압의 상처-검열을 딛고 선 한국영화 100년’ 전시회 간담회에서 김수용 감독은 “검열이 없었다면 한국영화가 지금보다 30~50년은 더 발전했고 봉준호가 50년 전에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자본으로 그려낸 자본주의의 계급 문제
1999년 ‘쉬리’ 이후 한국영화는 르네상스기를 맞이한다. 2003년 12월에 개봉한 ‘실미도’와 2004년 2월에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는 연이어 1000만 관객 신화를 만들어 낸다. 앞서 언급한 1990년대 후반 입봉 감독들이 이를 주도했다. 봉준호 감독 역시 2002년 ‘살인의 추억’을 통해 51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2006년 ‘괴물’을 통해 1000만 관객 신화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한국 영화시장이 커져가면서 대기업의 자본이 대거 영화계에 투자됐다. 제작 여건이 크게 개선되며 블록버스터까지 제작할 수 있게 됐다. 다만 투자가 원활할수록 감독의 연출에 대한 제한도 늘어난다. 제작비가 늘어날수록 리스크도 같이 커지고, 예술의 영역보다 상업의 영역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영화인들은 지금 상황에선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이 제작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할 정도다.
봉준호 감독은 대기업의 자금으로 성장했다. 블록버스터 ‘괴물’을 비롯해 ‘설국열차’도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다. ‘옥자’는 해외 자본 넷플렉스의 투자를 받았다. ‘기생충’ 역시 CJ엔터테인먼트가 투자했다. 사진은 ‘옥자’ 기자회견 당시 모습. 사진=최준필 기자
이후 봉준호 감독은 대기업의 자금으로 성장한다. 블록버스터 ‘괴물’을 비롯해 ‘설국열차’도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다. ‘옥자’는 해외 자본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았다. ‘기생충’ 역시 CJ엔터테인먼트가 투자했다. 그럼에도 봉준호 감독은 대기업의 자본을 통해 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이 아닌 봉준호 고유의 풍자와 재치를 기반으로 한 ‘보여주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
봉준호 감독의 대학시절 관련 글을 쓴 친구는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 작업을 앞두고 가진 술자리에서 봉 감독이 술김에 괴로운 심경을 토로했던 일화를 들려줬다. 당시 봉 감독은 “이 영화는 만들어지면 안 돼.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또 한 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말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희생자 가족들이 이 영화로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통해 대중은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런 관심은 공소시효가 끝난 뒤에도 경찰이 계속 수사를 진행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이제 그 사건의 명칭은 ‘이춘재연쇄살인사건’이다. 뒤늦게나마 범인이 잡혔기 때문이다. 당시 봉준호 감독의 진지한 고민은 결국 진범이 잡혀 희생자 가족들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치유되는 방향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조재진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