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배 결승 2국 복기 장면. 신진서(오른쪽)가 드디어 박정환을 넘고 우승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이런 승부들이 있다. 역사의 변곡점과 같은 결승전. 28년 전 제3회 동양증권배 결승 5번기, 16세 이창호가 린하이펑을 3 대 2로 꺾고 최연소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17년 전 제7회 LG배 결승 5번기, 스무 살 이세돌은 당시 일인자 이창호를 3 대 1로 꺾고 우승하면서 세계대회 폭격을 시작했다. 당대 일인자 박정환을 꺾은 이번 우승도 그런 느낌이다. 신진서는 현재 19세, 프로기사 입단 후 7년 7개월 만에 메이저 세계대회 정상에 올랐다. 바둑계 ‘OO 후 세대’에서 유일한 세계챔피언이다. 기존의 틀을 깨버린 절대 강자의 출현. 새 시대. 신화의 서막이다. 역사에 기록될 제24회 LG배 결승전 내용도 환상적이었다.
[제24회 LG배 결승1국] 초콜릿의 여유, 묻혀버린 묘수
●박정환 ○신진서. 236수 백불계승. 2020.02.10.
장면도1(실전진행)
참고도1
참고도2
결승전은 경기도 광명 라까사호텔 특별대국실에서 열렸다. 제한시간은 각 3시간, 1국부터 혈전이었다. 신진서가 초반을 앞서고, 중반 박정환이 형세를 역전시켰다. 종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신진서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초콜릿을 씹으며 버텼다. 박정환이 ‘이겼다’라고 생각했을 때, 신진서가 괴력의 수읽기로 판을 흔든다. 인터넷과 방송, 유튜브까지 해설하던 프로기사들이 모두 놓친 단 하나의 변화를 신진서가 찾았다.
실전진행 백7까지 신진서가 팻감을 키우자 그제야 박정환은 우변 대마사활에 착각이 있었음을 깨닫고 뒤통수를 툭툭 쳤다. 쓴웃음을 지으며 흑8로 보강한다. 사실 이전에도 박정환에겐 무려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기회는 있었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결국 대마가 다 죽었다. 현장 심판은 정대상 9단이었다. 오전 9시부터 약 6시간 30분 동안 정자세로 대국현장을 지켰다. 대국이 끝나자마자 정대상은 검토실에 들어와 마지막 한 수를 지적했다. “이거 되는 수 아닌가?”
장면도1(실전진행)에서 좌상귀가 포인트다. 백15로 패가 났다. 그 여파로 우변에서 A, B가 연타당했고 흑 대마(세모 표시)가 모두 잡혔다. 정대상 9단이 발견한 수는 실전진행 흑10 대신 참고도1처럼 흑1로 먼저 잇는 수다. 이후 같은 수순을 밟아도 부분적으로 빅이 나는 모양이다. 바깥을 둘러싼 백(네모 표시)은 두 집이 없기에 이건 흑승이다. 만약 참고도2의 백2처럼 바로 대응하면 흑3, 5 이후 뒤로 메우면 촉촉수다. 어떻게 대응해도 백이 바로 잡힌다. 사실 시간이 많았던 신진서는 참고도 흑1을 실전에서 보고 있었다. 초콜릿을 삼키며 흥분을 감추고 있었다. 사실 이런 수순이 있었기에 초읽기에 몰려서 감각적으로 둔 장면도1 흑6(참고도2에 X표시)이 진짜 묘수였다.
[제24회 LG배 결승2국] 움츠러든 박정환, 전투력 빛난 신진서
●신진서 ○박정환. 161수 흑불계승. 2020.02.12.
장면도2(실전진행)
결승 2국, 박정환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왔다. 비장함이 느껴졌다. 하루를 쉬어도 1국에서 대역전패를 당한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증거는 바둑 내용이다. 박정환은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했다. 머뭇거리며 움츠러들다 무기력하게 졌다. 다르게 표현하면 신진서가 완벽한 전투력을 보여준 흑의 완승국이다. 실전진행2, 백세모가 대완착이다. 바로 C자리로 잇고 싸웠어야 했다. 초반 약간 밀렸던 백의 승률그래프는 이때부터 폭락했다. 백세모 이후 좌하귀 흑1을 두고, 하변 흑21까지 실리를 한껏 챙긴 신진서는 중앙전투에서 흑37로 못을 박으며 승기를 잡았다. 이후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없었다.
LG배 우승상금은 3억 원이다. 신진서는 2012년 1회 영재입단대회를 통해 만 12세 4개월의 나이로 프로기사가 되었다. 입단 1년 6개월 만에 신예기전인 ‘2기 합천군 초청 미래포석열전’에서 우승하며 존재감을 알렸다. 신예대회였지만 13세 10개월 우승은 국내 공식기전 최연소 기록이었다. 2015년 12월, 입단 3년 5개월 만에 당시 국내 최대기전이었던 렛츠런파크배에서 우승했다. 2017년 국제신예대회인 글로비스배 정상에 올랐고, 작년 6월에 제31회 TV바둑아시아선수권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10대 마지막 순간에 천적으로 군림했던 박정환 9단을 물리치고 입단 후 12번째 우승, 메이저 세계대회 첫 우승에 성공한다.
결승전을 마친 신진서는 “LG배 4강에서 커제 9단, 결승에서 박정환 9단을 이기고 우승했다. 내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다. 메이저 대회는 이제 첫 우승이다. 앞으로 세계대회에서 더 많이 우승하고 세계 최고가 되는 게 목표다. 이세돌·커제처럼 영향력 있고 역사에 남는 기사로 기억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