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의 기억: 90x18cm 한지에 탈색기법 2019
우리나라 전통회화는 조선시대 회화가 거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고 조선의 회화의 중심에는 문인화가 있다. 문인사대부의 정신세계를 절제된 표현으로 그려내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따라서 표현을 위한 다양한 기법의 개발을 천히 여겼다.
이런 이유로 문인화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지식인의 취미 정도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서예의 본질에서 새로운 회화의 길을 찾으려 했다.
즉 글에 담긴 고매한 정신을 그림으로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다. 지적 충만함이 보이는 그림, 교양과 인격이 우러나오는 그림을 그리려는 시도였다.
대숲의 기억: 24x24cm 화선지에 투명액, 아교 등 혼합재료 2017
이에 따라 글자의 기운을 회화 속에 담으려는 노력이 나타났는데, 문자의 형상미를 좇거나 서예의 필력으로 산수화를 그리려는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를 두고 미술사가들은 ‘서권기(글의 정신)’ 혹은 ‘문자기(글씨의 정신)’라 칭했다.
이런 미학의 중심에 있던 이가 추사 김정희다. 그는 조형성이 강하게 풍기는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 서예의 추상적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문인화의 파격적 변화였다. 추사의 제자들은 이런 시도를 회화적으로 더욱 발전시켜 ‘신감각산수’를 창출해낸다.
서예의 필력과 정신성에 서양 회화의 기법을 융합하는 방법이었다. 대표적 작가가 북산 김수철이다. 그는 예서나 전서를 쓰듯 균일하게 힘을 준 중봉(붓을 똑바로 세워 쓰는 서예의 기본자세)의 필치로 산수화의 새로운 감각을 만들었다. 옅은 먹과 색채를 머금은 붓에 부드럽게 힘을 주고 같은 기운으로 풍경을 그리는 방법이었다. 글씨의 기운을 그림 속에 담아낸 이런 시도는 문인화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한국 미술의 진정한 법고창신의 길이었던 신감각산수는 서양미술 도입으로 맥이 끊어져버렸다.
대숲의 기억: 32x44cm 한지에 탈색기법, 혼합재료 2019
이러한 맥을 살려내려는 시도가 최근 다시 일어나고 있다. 우리 미술 혁신의 흐름 속에서 눈에 띄는 작가가 이일구다. 그는 서예로 다진 필력과 전통 문인화의 기법을 바탕 삼아 자신만의 새로운 회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회화를 펼치려는 시도는 20세기 말부터 꾸준히 있었다. 표현력이 풍부한 서양회화 재료와 기법을 동양화에 접목하는 방법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일구는 전통 재료와 기법, 문인화 조형방식을 버리지 않고 그 안에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문인화의 대표적 소재인 대나무를 그린다. 그런데 지워서 그리는 독특한 방식이다. 전통 한지에 채색을 하고 그 위에 자신이 고안한 탈색 기법으로 새로운 느낌의 대나무를 그린다. 전통 정신을 지우지 않고도 이 시대 정서에 맞는 문인 정신을 만들어낸 셈이다. 현대 회화로 통하는 새로운 기법의 회화이기 때문이다.
전준엽 화가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