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손승락은 군복무 직후인 2010년 전 소속팀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에서 처음 마무리 투수를 맡았다. 첫 시즌 26세이브를 올리며 실력을 검증받은 뒤 줄곧 전문 소방수로 활약했고, 2016년 프리에이전트(FA)가 돼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한 뒤에도 꾸준하게 세이브 기록을 쌓아나갔다. 2010년과 2013~2014년, 2017년에 네 차례 세이브 1위에 올랐고, 특히 2013년에는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19년 만에 마무리 투수가 황금장갑을 손에 넣는 역사를 썼다.
어느덧 손승락의 통산 세이브 수는 271개까지 늘었고, 오승환이 보유하고 있던 역대 최다 세이브(277세이브)에 6개 차로 근접했다. 그러나 손승락은 더 이상 기록을 쌓아 올리지 못하게 됐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두 번째 FA 자격을 얻었지만, 원 소속구단 롯데와 FA 협상에서 난항을 겪다 끝내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프로 통산 성적은 601경기 45승 49패 271세이브 7홀드 평균자책점 3.64. 롯데는 5월 22~24일 사직구장에서 열리는 전 소속팀 키움과 홈경기에서 손승락의 은퇴식을 치러줄 계획이다.
KBO 리그 최고 마무리로 활동하던 손승락(왼쪽)과 오승환이 각각 은퇴와 KBO리그 복귀로 입장이 엇갈리게 됐다. 사진=임준선 기자
#FA 투수 손승락의 은퇴, 막전막후
지난 2월 7일 롯데는 돌연 “손승락이 은퇴하기로 결정했고, 구단도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새 시즌을 준비하는 스프링캠프가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야구계는 “예상됐던 일”이라는 반응과 “은퇴까지 선언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으로 양분됐다. FA 협상이 2월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협상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신호. 구단이 웬만해선 물러서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이 경우 대부분 ‘FA 미아’가 될 위기에 놓인 선수 쪽이 먼저 두 손을 든다. 손승락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대신 그라운드를 떠나는 쪽을 택했다.
손승락은 지난해 11월 초 FA 자격 승인을 신청한 뒤 롯데와 협상을 위해 네 차례 만났다.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손승락은 이미 30대 후반에 접어든 베테랑인 데다 첫 FA 계약 때 4년 60억 원이라는 큰 금액에 계약했던 터다. 타 구단이 손승락을 영입하려면 보상선수를 한 명 보내야 하며 2019년 연봉 7억 원의 2배에 달하는 14억 원을 보상금으로 지출해야 했다. 감수해야 할 출혈이 너무 컸다. 그렇다고 원 소속구단 롯데 역시 큰돈을 들이거나 다년 계약을 보장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손승락이 지난해 후반기에 기량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한때 마무리 투수 자리를 잠시 내려놓았을 정도로 하락세가 완연했던 탓이다.
손승락도 처음에는 현역 생활을 연장할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단이 1년 계약에 예상보다 훨씬 더 적은 금액을 제시하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팀이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의욕도 떨어졌다. 또 마지막으로 내놓은 ‘시즌 후 코치 연수 지원’ 요청까지 구단이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마음을 굳혔다. 의미 없이 1년 더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느니 가족 곁에서 그동안 못한 가장 역할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롯데는 “두 번째 FA 자격을 얻은 손승락과 협상을 진행해왔고, 성민규 단장이 총 네 차례 선수와 만나 재계약을 논의했지만 선수 본인의 은퇴 의사가 강했다. 구단이 제시한 계약 조건과는 관계없는 결정이었다”고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또 손승락은 구단을 통해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 주고 정상의 자리에 섰을 때 내려오길 원했다. 이제는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다”고 은퇴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애초에 “은퇴하고 싶었다”는 선수가 FA 신청을 하고 네 차례나 협상 자리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손승락은 가능한 한 현역 생활을 계속 하려는 의지가 있었지만, 결국 양측이 원하는 조건이 너무 달라 협상이 ‘결렬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구단에서 2년 계약 혹은 좀 더 좋은 금액을 제시했다면, 손승락의 선택도 달라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끝판대장’ 오승환이 KBO 리그에 돌아온다. 마운드 복귀 시기는 해외 원정 도박 징계가 마무리되는 5월이 될 전망이다. 사진=연합뉴스
#돌아온 오승환과 30경기 결장 핸디캡
공교롭게도 손승락과 동갑내기인 소방수 오승환은 올해부터 다시 KBO 리그에서 뛴다. 통산 세이브 2위 손승락의 기록 덧셈이 멈춘 것과 동시에 1위 오승환의 세이브 수가 다시 늘어나게 된 셈이다. 오승환은 말이 필요 없는 한국 야구 역대 최고 소방수다. 2005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뒤 2006년 곧바로 마무리 투수 자리를 꿰찼고, 단 9시즌만 뛰고 해외에 진출했는데도 277세이브를 쌓아 올려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을 갈아 치웠다. 시즌 평균이 31세이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기록. 2006~2008년과 2011~2012년에는 총 다섯 차례나 구원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 후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간 일본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지만, 오승환의 아성에 도전할 만한 마무리 투수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극소수를 제외하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마무리 투수가 별로 없다’는 한숨만 더 커졌다. 불붙은 위기 상황을 진화한다는 의미로 ‘소방수’라 불리는 보직인데, 불을 끄러 올라왔다가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센 불을 번지게 해놓고 내려가는 투수들이 많았다. 어렵게 중책을 맡긴 마무리 투수를 한 시즌은커녕 한두 달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교체해야 하는 팀들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1점대 평균자책점 소방수’ 오승환의 복귀는 한국 야구팬들에게 큰 기대를 안길 수밖에 없다. 오승환은 47세이브를 올린 2006년 평균자책점이 1.59에 불과했고, 2011년에는 역시 47세이브를 올리면서 평균자책점 0.63으로 시즌을 마쳤다. KBO 리그 9년 통산 평균자책점이 1.69. 비록 한국을 떠날 때보다 나이가 여섯 살 더 많아졌지만, 쉽게 녹슬 기량이 아니다.
다만 과거 해외 원정 도박에 연루됐다가 받은 72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아직 다 소화하지 못한 게 걸림돌이다. 시즌 첫 30경기에 나설 수 없어 5월 초에나 복귀할 수 있다. ‘돌아온 끝판대장’의 돌직구를 보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오승환 없는 사이 펼쳐질 소방수 ‘춘추전국시대’
그 사이 다른 구단 마무리 투수들이 최고 소방수 자리를 놓고 ‘춘추전국시대’를 펼칠 조짐이다. 때마침 지난 시즌에 유망한 마무리 투수들이 각 구단에 속속 등장했기에 더 그렇다. 충분히 오승환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 만한 소방수들이 많다. 나이와 투구 스타일, 경력이 천차만별이지만 모두 만만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지난해 세이브 1위에 오른 SK 와이번스 하재훈과 2위인 LG 트윈스 고우석, 국가대표 마무리 투수인 키움 조상우가 대표적으로 구원왕 레이스를 펼칠 투수들이다. 기량이 출중한 데다 팀 전력까지 탄탄해 더 유리하다. 셋 다 시속 150km를 웃도는 직구를 던지는 강속구 투수들이다. 나란히 지난해 11월 프리미어12 대표팀에 뽑혀 실력을 뽐냈다.
미국 마이너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에서 경험을 쌓은 하재훈은 산전수전을 다 이겨낸 강심장이 돋보이고, 이제 20대 초반인 고우석은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조상우는 점점 더 괴물 같은 투수로 진화하고 있다. KT 위즈 이대은도 하재훈과 함께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다 지난해 유턴한 ‘늦깎이 신인’이다. 선의의 경쟁을 다짐하면서 KT의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을 다짐하고 있다.
한화 이글스 정우람과 NC 다이노스 원종현은 베테랑 클로저의 자존심을 세울 투수들이다. 2018년 구원왕 정우람은 지난해 팀이 부진해 세이브를 올릴 기회가 많지 않았다. 올해 4년 FA 계약을 하고 한화에 남았고, 팀 성적과 동시에 반등을 노린다. 원종현 역시 기복이 심하던 NC 불펜을 굳건하게 잘 지탱한 관록의 소유자다.
여기에 지난 시즌 중반부터 소방수를 맡았다가 태극마크까지 단 KIA 타이거즈 문경찬, 포수 양의지(NC)의 보상선수로 뽑혀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가 소방수 자리를 꿰찬 ‘신데렐라’ 이형범도 올해는 소방수 자리에서 시즌을 출발한다. 손승락을 내보낸 롯데는 유일하게 스프링캠프에서 후임자를 찾아야 하는 상황인데, 주로 선발로 기용됐던 김원중이 1순위 후보다.
모두 지난해 실력 혹은 가능성을 검증받았기에 더 기대가 큰 투수들이다. 정우람과 원종현을 제외하면, 대부분 시즌 초반 혹은 중반에 전임 소방수들의 부진으로 자리를 넘겨받았다가 눌러앉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오승환 역시 그랬다. 신인이던 2005년 불펜에서 셋업맨으로 활약하다 시즌 중반 임시 마무리 투수를 맡은 뒤 그대로 자리를 굳혔고, 이듬해부터 7년간 삼성의 뒷문 걱정을 없앴다.
올해 오승환을 제외한 9명의 소방수는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동시에 스타트를 끊는다. 치열한 최고 소방수 경쟁에 5월 오승환까지 가세하면, KBO 리그는 모처럼 ‘소방수 풍년’에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다. 8월 열리는 2020 도쿄올림픽에 각 팀 소방수들이 총출동해 1이닝씩 강력한 릴레이 피칭을 펼치는 흐뭇한 상상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