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경의 알바몬 광고는 2012년 MBC 예능 ‘나는 가수다2’에서 나왔던 말실수가 유행어가 된 것에 착안했다. 사진=MBC ‘나는 가수다2’ 화면 캡처
가장 최근 대중이 기억할 사례 중 하나는 가수 박미경의 알바몬 CF다. 아르바이트생들의 활약을 지켜보던 박미경이 “완전 XXX를 뒤집어 놓으셨다. 진짜, 최고의 알바, 파이팅!”이라고 외치는 20초가량의 짧은 광고. 이 대사의 원본을 찾으려면 무려 7년이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12년 MBC 예능 ‘나는 가수다 2’에서 록밴드 백두산을 향해 외쳤던 박미경의 리액션 대사가 원본이다.
당시 박미경은 “역시 백수단(백두산을 잘못 말함) 선배님, 완전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진짜, 최고의 선배, 파이팅!”이라는 이른바 ‘국어책 리액션’으로 대중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좋은 말을 다 붙였음에도 영혼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 대사는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박미경의 이 대사는 그가 2018년 JTBC 예능 ‘히든싱어 5’에 출연해 후일담을 밝히면서 다시 한 번 조명을 받았다. 박미경은 “당시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카메라가 들어왔다. 뭐라고 말은 해야 하는데 생각이 안 나서 그냥 떠오르는 단어를 다 끌어다 쓴 것”이었다고 어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잠시 이 대사를 잊고 있었던 대중을 다시 한 번 웃게 만든 결과, 박미경은 2019년 말 알바몬의 CF 모델로 발탁돼 유쾌한 매력을 뽐낼 수 있게 됐다.
‘궁예’와 ‘김두한’ 역으로 유명한 배우 김영철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먼저 유행한 그의 대사가 버거킹 CF 출연으로 이어졌다. 사진=버거킹 CF 캡처
박미경에 앞선 ‘유행어 선배’로 배우 김영철이 있다. 셀 수 없는 인터넷 유행어와 그에 따른 패러디를 자랑하는 김영철의 대표적인 유행어 ‘사딸라’는 양지(?)로 나오기까지 17년이 걸렸다. ‘야인시대’가 방영할 당시엔 태어나지도 않았던 어린 학생들이 김영철을 보자마자 “사딸라 아저씨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 역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들어낸 방대한 양의 유행어 패러디 영상 덕이다.
다만, 드라마는 명작이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제작한 패러디 영상은 희화화에 목적을 두고 있어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특히 시청자에 제한이 없는 유튜브로 패러디 영상의 공개 영역이 넓어지면서 원본이 아닌 패러디로만 이를 접할 세대에게 배우와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심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우려였다.
이와 관련해 김영철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희화화의 우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밝히기도 했다. 그는 “서운하다기보다 혼을 담아 정직하게 연기한 대사들이 뭐가 그리 재밌을까 많이 궁금했다”며 “재밌는 걸 발굴해 즐기는 젊은이들의 기발함을 보며 이 사회가 그렇게 삭막하지만은 않구나라는 안도감을 느낀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딸라’의 인기로 김영철은 2019년 1월 버거킹 CF를 촬영해 젊은이들의 기발함에 화답한 바 있다.
김영철의 ‘궁예’ 유행어는 20년 만에 화장품 CF 대사로 재탄생했다. 사진=에뛰드하우스 CF 캡처
김영철의 인생 캐릭터 중 하나이자 또 다른 유행어 제조기 ‘궁예’ 역시 약 20년의 세월을 넘어서 화장품 광고 모델 자리를 꿰찼다. 지난해 3월 에뛰드하우스의 립스틱 광고에 등장한 김영철은 궁예의 명대사 “누가 지금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를 직접 패러디해 큰 관심을 이끌어냈다. 이는 주로 남성 회원들이 주축이 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인기를 끌었던 중년 남성 배우와 그 유행어가 여성 고객에게도 먹힌다는 선례를 마련한 것이기도 했다. 광고업계에서 스타들의 인터넷 밈에 주목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아직 광고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배우 권상우의 ‘소라게’ 역시 다방면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소라게’는 2005년 방영한 MBC 드라마 ‘슬픈 연가’에서 상대역인 김희선과 연정훈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던 권상우가 비니 모자를 내리며 눈을 가리는 신을 말한다. 모자가 얼굴 절반을 가리는 모습이 마치 소라게가 껍질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붙여진 이 별칭이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퍼지기 시작한 것은 2017년. 모든 스타들의 인터넷 밈이 그렇듯 권상우의 소라게 역시 예상치도 못한 시점에서 터졌다.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소라게’를 소환해낸 배우 권상우. 사진=MBC 라디오스타 캡처
불현듯 옛날 드라마가 떠올라서 ‘슬픈 연가’를 보던 한 네티즌이 이 신을 발굴해 냈고,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지면서 10~20대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권상우는 몰라도 소라게는 아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소라게를 그대로 패러디한 카카오톡 이모티콘이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도 그 덕분이라는 것이다.
본인의 입장은 어떨까. 앞서 권상우는 지난 1월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소라게 장면을 흑역사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고 오히려 자부심을 느낀다”며 “젊은 친구들에게는 희화화돼서 알려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기분 나쁘진 않다. 어쨌든 저를 다시 생각해주는 거니까”라며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본인은 그 장면을 찍고 “연기 죽인다”라고 자찬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관련기사 [인터뷰] ‘소라게’에서 ‘히트맨’으로…소처럼 일한 권상우 “아직도 연기 갈증”).
이 같은 ‘흑역사’의 재발견이 연예계의 시각도 변화시켰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한 연예기획사 배우 매니지먼트 관계자는 “지금까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유행해 온 연예인 짤(인터넷에 올리는 작은 사진 또는 영상) 가운데 그 연예인 본인이나 소속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며 “특히 배우들은 이미지가 생명인데 희화화된 사진이나 영상이 계속 유포되면 향후 캐스팅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그는 그러면서 “그런데 요즘은 이를 역이용해서 CF나 예능에서 더 다양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돼 소속사에서도 시각이 좀 달라진 상황”이라며 “오히려 ‘이거 인터넷에서 뜰 것 같다’ 싶으면 소속사에서 먼저 나서서 SNS 영상도 만들고 ‘짤’도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