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울산시 남구 대성산업가스 에너지저장장치(ESS)에서 불이 나 건물 밖으로 화염이 치솟는 가운데 소방대원들이 진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SS(Energy Storage System, 에너지저장장치)는 전기에너지를 저장해 놓고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일종의 ‘전력 창고’다. 신재생에너지 산업의 필수적인 장치로,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 등이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지는 약점을 보완해준다.
ESS 화재는 2017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총 28건 발생했다.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정부와 전문가들(민관합동 ESS 화재사고 원인조사단)이 조사에 착수한 건 총 두 차례다. 1차 조사 대상은 2017년 8월부터 2019년 5월까지 발생한 23건의 화재였다. 조사단은 분명한 원인을 밝혀내는 데 실패했다. ESS 화재는 일반적인 화재와는 달라 단서 찾기가 어려워서다. 전기 화재라 진화 작업이 조심스레 진행됐고, 불이 모든 걸 다 태운 뒤 스스로 꺼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일도 있었다. 명확한 단서를 찾지 못한 조사단은 결국 ‘ESS 설치 부주의와 열악한 운영 환경’ 등이 화재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1차 조사단 발표 이후 2019년 10월까지 추가로 5건의 ESS 화재가 더 발생했다. 곧 2차 조사단이 꾸려졌고 4개월가량 심층 조사를 진행했다. 1차 조사 과정에서 발견됐던 ‘배터리 셀 결함’이 이번 사고 조사에서도 확인되면서, 2차 조사는 배터리 자체 문제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진행됐다. 그리고 지난 2월 6일, 2차 조사단은 최종 결과를 발표하며 화재 원인을 배터리로 지목했다. 조사 보고서를 보면 배터리 양극판 손상과 내부 이물질 형성 등이 발견됐고, 내부부터 불이 난 흔적이 있었다는 점이 강조돼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증거는 ‘정황’뿐이었다. 추가로 발생한 5건의 화재에서도 핵심 증거들은 모두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사단은 업체들에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성능으로 만들어진 배터리로 실험을 했고, 이 때문에 조사위는 배터리 ‘결함’이 아닌 배터리 ‘이상’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을 썼다. 곧바로 후폭풍이 불었고 논란은 전방위로 확산 중이다.
#뒤집힌 결론에 LG화학·삼성SDI 반발
당장 배터리 제조업체 LG화학과 삼성SDI가 반발하고 나섰다. 1차 조사에서는 화재 원인이 환경과 운영 문제로 결론 났는데, 2차 조사 결과에서는 사실상 두 회사가 연쇄 화재 사건의 ‘주범’이며 제품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취지로 결과가 뒤집혔기 때문이다. 화재가 발생한 ESS 대부분은 두 회사에서 생산했다.
LG화학과 삼성SDI는 공개적으로 조사단 발표를 반박하며 조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다. LG화학은 최근 설명자료를 내고 “지난 4개월간 실제 사이트를 운영해 가혹한 환경에서 자체 실증실험을 실시했으나 화재가 재현되지 않았다”며 “조사단에서 발견한 내용은 일반적인 현상이거나 실험을 통해 화재의 직접 원인이 되지 않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반박했다.
삼성SDI 역시 “조사단이 분석한 내용은 화재 발생 현장이 아닌 비슷한 시기에 제조돼 다른 현장에 설치·운영 중인 배터리를 분석해 나온 결과”라며 “휘발유도 성냥불 같은 점화원이 있어야 화재가 발생한다. 휘발유 자체로는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어 “ESS에서 배터리는 유일하게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화재를 확산시킬 수는 있지만 점화원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학계와 업계 의견도 갈린다. 조사단 보고서를 검토한 한 대학 전기공학부 교수는 “조사단이 사고 현장 잔해물과 시스템 기록, CCTV 영상 등을 확인했다. 조사는 신중히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며 “배터리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하면서 불량이 발생했다고 판단했다는 취지다. 품질이 더 좋았다면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반대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화재가 발생한 곳의 ESS는 모두 야외에 가건물이나 임시 구조물에 설치돼 있었다. 온도나 습도 조절은 물론, 전담 인원이 철저하게 관리하지도 않았다”며 “1차 조사와 달리 2차 조사에는 ‘배터리’에만 집중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조사단의 한 관계자는 “제조업체와 업계 등 반발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2차 조사단의 목적은 원인 판단보다는 재발 방지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실적 주저앉고 해외 경쟁 타격
이번 ESS 화재사고 조사위의 결과는 행정 조치 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생산 중단 등 법적으로 별도의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없다. 정부도 조사단이 발표한 안전 및 재발방지 대책에 더 힘을 실을 방침이다.
그런데도 LG화학과 삼성SDI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른 타격이 심각해서다. 2019년 두 회사의 국내 ESS 발주 건수는 ‘0’건. 화재 원인과 관계없이 별도의 안전 대책을 마련하면서 적지 않은 비용도 투입했다. LG화학은 ESS 충당금으로 3000억 원을, 삼성SDI는 2000억 원을 설정했다.
이 비용들은 모두 지난해 4분기 실적에 반영됐다. 최근 공개된 두 회사의 지난해 실적을 보면, LG화학은 2010년대 들어서서 가장 낮은 영업이익률을 기록했고, 처음으로 분기 기준(4분기) 영업손실을 냈다. 삼성SDI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영업이익이 90%가량 줄었다. 2차 조사단이 안전대책을 추가로 발표하면서 앞으로 비용은 더 투입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앞으로 보험사와의 법적 분쟁도 피할 수 없게 됐다. 2차 조사 대상 ESS 화재에 대한 보험금을 지급한 보험사들이 배터리 제조업체들을 상대로 구상권 청구에 나설 계획이다. ESS 설비를 포함한 시설업체들이 가입한 보험(CMI, 기관기계보험)은 제3자 책임이 있을 경우 면책 조항이 있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2차 조사 결과로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조사 대상이었던 5건의 화재뿐만 아니라 1차 조사 대상 화재 사건(23건)에 대해서도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2년간 사실상 ‘개점휴업’에 머무른 데 이어 해외 시장에서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재 세계 ESS 시장은 LG화학과 삼성SDI가 주도하고 있다. 두 회사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80%에 이른다. CATL, BYD 등 중국 업체가 추격하고 있지만 점유율 격차는 상당하다.
해외 업체들은 주로 한국 기업 제품을 써왔는데, ‘한국 제품은 안전성이 검증됐다’는 이유였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다른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해외 경쟁사들이 이번 2차 조사 결과를 근거로 영업을 하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조사 내용을 잘 아는 한 정부 관계자는 “한국 기업의 기술력은 다른 해외 업체들에 비해 월등하다”며 “제품이 개선되고 보완되면 더 신뢰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