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사건 관련 뇌물공여 등 혐의 파기환송심 4차 공판을 마치고 서울고법을 나서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고성준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을 심리 중인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는 지난 6일 특검과 이 부회장 측에 ‘공판준비기일 변경 명령’을 내렸다. 14일로 예정됐던 공판준비기일은 취소됐고 다음 재판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다.
당초 재판부는 14일 공판준비기일에서 지난 1월 조직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실효적 활동을 검증하기 위한 전문심리위원 도입과 관련한 절차를 특검 및 이 부회장 측과 논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기일 변경 명령을 하며 양측에 준법감시위에 대한 의견을 각각 제출하라고 통보했다. △준법감시제도에 대한 전반적 의견 △준법감시제도가 양형사유인지 혹은 그렇지 않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준법감시제도를 검증할 형사소송법상 전문심리위원이 부적절하다는 특검 의견에 대한 이 부회장 측의 반론 등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 1월 17일 열린 공판에서 재판부가 준법감시위가 효과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평가해 이 부회장 양형에 반영하겠다고 밝히자, 특검팀은 “재벌체제의 혁신 없는 준법감시 제도에 반대한다”고 반발했다.
재판부가 갑자기 ‘의견수렴’을 이유로 일정을 연기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국회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의 반대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연장선상에서 헌법이 보장한 재판부의 권한을 흔들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국회의원들과 노동·시민단체들은 지난 4일 국회에서 ‘재벌개혁·정경유착 근절·사법정의 실현을 희망하는 국회의원·노동·시민단체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파기환송심과 관련해 “그럴싸하게 포장됐지만 결국 재벌총수 봐주기 아니냐는 우려가 현실이 됐다”며 “어떤 법적 권한과 책임도 없는 외부기구가 이 부회장의 범죄 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돼 형량을 고려하기 위한 방편이 돼선 안 된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달 17일 공판에서 재판부는 이 제도가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용된다면 양형 조건으로 고려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사법부와 재벌의 짜맞춘 듯한 양형 봐주기 공판 진행으로밖에 볼 수 없다”며 “재판부는 사법 정의 차원에서 대법원 판결 취지를 충실히 반영해 재판해야 한다. 공정하고 투명한 재판 운영을 통해 재벌체제 혁신과 정경유착 근절을 끌어내지 않으면 국민은 결코 이 재판 결과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교수·법조인 등이 모인 지식인 483명도 지난 13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죄 확정 뒤 양형단계에서 급조된 준법감시조직이 감형 사유로 참작되는 것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며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을 담당하고 있는 재판부는 이 재판의 역사적 의미의 엄중함을 깊이 새겨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진행하고, 이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물하기 위한 곡학아세 경거망동을 중단하라”고 재판부에 촉구했다.
과거 총수가 재판을 받은 바 있는 기업의 한 관계자는 “기업 총수의 재판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다. 한마디 한마디가 중계되다보니 기업뿐만 아니라 재판부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며 “특히 정치권까지 나서 재판부의 발언에 의견을 타진하니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재판부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문제없다는 반론도 있다. 삼성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 온 한 변호사는 “민주주의는 공개재판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투명하게 재판을 공개함으로써 국민들을 설득시켜야 한다”며 “사법부의 판단과정이나 선고결과에 대해 합리적인 선에서 비판하는 것은 당연히 재판부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재판부가 이재용 부회장 측에 유리한 듯한 태도를 보여와 반발을 불러온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타 대기업 오너들의 재판을 보면 재판부가 총수들에 상황이 불리한 것처럼 진행하다가 판결에서 가벼운 형을 선고했다. 반대 측 입장에서 반박할 기회조차 없게 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이번 이재용 재판부는 초기부터 회복적 사법, 준법감시위 설치를 통한 감형 가능성 등을 거론하며 이 부회장에 유리한 상황처럼 보이도록 했다. 재판 진행 중 반발이 나오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고 전했다.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서초타워에서 열린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첫 회의에서 김지형 위원장(왼쪽 두번째)이 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편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준법감시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된다. 대법관을 지낸 김지형 위원장이 이끄는 준법감시위는 지난 5일과 13일 두 차례 회의를 각각 6시간에 걸쳐 진행했다. 첫 회의에서는 준법감시위 규정과 운영원칙을 정하고, 감시대상인 삼성 7개 계열사의 보고를 받는 데에 시간을 할애했다. 이어 두 번째 회의에서는 7개 계열사의 대외 후원금 지출 등 준법감시위에 보고된 안건들에 대해 심층 심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 ‘양형 깎아주기’ 논란이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문제,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조작 사건, 노조 와해 사건 등에 대해서는 다뤄지지 않았다. 특히 지난 13일 회의 직전 뉴스타파 보도를 통해 알려진 이 부회장 프로포폴 주사 상습투약 의혹에 대해서도 거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변호사는 “과거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의 비리 의혹이 불거졌을 때도 삼성그룹은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 등 쇄신안과 준법다짐을 발표했다. 하지만 결국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며 “준법감시위가 이재용 부회장의 문제를 밝히지 않으면 또 다시 무용으로 끝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