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왔나 좀 보자” 영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가 19일 오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기생충’ 기자회견에 참석해 취재진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이날 봉준호 감독은 “이곳에서 제작보고회를 한 지 1년이 됐다. 영화가 긴 생명력을 가지고 세계 이곳 저곳을 다니다 오게 돼 기쁘다”고 운을 띄우면서도 “기분이 묘하다”라며 잠시 감정이 벅차오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봉 감독은 지난해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제작보고회를 진행했다. 이후 약 10개월 만에 해외 유수 영화제를 석권한 뒤 금의환향한 셈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앞서 봉준호 감독은 이를 두고 “로컬(지역적인) 영화제”라고 칭해 미국 영화계를 발칵 뒤집은 바 있다.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계획적인 도발이 아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봉 감독은 “오스카가 처음인데 도발씩이나 하겠나”라며 “칸, 베니스, 베를린은 국제영화제고 아카데미는 미국 중심 영화제임을 설명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미국 젊은이들이 트위터에 그걸 많이 올렸던 모양이다. 전략을 가지고 이야기한 건 아니고 대화 과정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였다”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별한 인연과 관련한 소감으로 눈길을 모았던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이야기도 나왔다. 봉 감독은 “오늘 아침에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이 편지를 보냈다. 나로서는 영광이었다. 개인적인 편지라 전부 공개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문장에 ‘그동안 수고했고 좀 쉬어라. 대신 차기작을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조금만 쉬어라. 빨리 일해라’고 하더라. 그게 정말 감사했다”고 말했다.
영화 ‘기생충’ 기자회견에 참석한 배우 송강호가 오스카 레이스에 참가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로 꼽히는 송강호는 오스카 레이스 경험에 대해 “처음 경험하는 과정이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미국에) 갔다고 해도 무방하다”면서도 “그런데 최고의 순간을 함께 호흡하고 이 과정을 밟아나가다 보니, 이런 과정이 내가 아니라 타인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아가는 과정이란 걸 깨닫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상을 받기 위한 과정이라기 보단 이 과정을 통해 세계 영화인들과 공유하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것을 알게 되고 느끼며 배우게 됐다”며 “6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 내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위대한 예술가를 통해 많이 느꼈다”고 설명했다.
당시 오스카 캠페인을 진행한 것에 대해 봉 감독은 “마치 ‘게릴라전’ 같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봉 감독은 “캠페인 당시 북미 배급사 네온은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중소배급사였고 우리가 처한 상황은 마치 게릴라전 같았다”라며 “거대 스튜디오나 넷플릭스 같은 회사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치는 예산으로, 열정으로 뛰었다. 그 말은 저와 강호 선배님이 코피를 흘릴 일들이 많았다는 의미다. 인터뷰만 600차례 이상, 관객과의 대화도 100회 이상 했었다”고 밝혔다.
영화 ‘기생충’ 기자회견에 참석한 배우 송강호와 봉준호 감독. 사진=고성준 기자
배우와 감독의 코피를 발판으로 높아진 영화의 위상만큼이나 출연진들의 입지도 넓어졌다. 일부 배우들 가운데는 헐리우드 러브콜을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정은은 “사실 영화 촬영 초반엔 제가 배우가 돼서 할리우드나 한번 가봐야 하지 않나 했다. 그런데 ‘기생충’ 이후 세계에서 알아주니, 꼭 가야 하나 싶다. 그런 기회가 온다면 생각해보겠다”며 농담을 던졌다.
박소담은 “‘기생충’이 끝나고 ‘특송’이 마무리 됐다. 시간이 잘 맞아서 캠페인에 참여했는데 마침 좋은 연락들을 주셔서 색다른 화보를 찍고 왔다. 많은 사랑을 받은 만큼 관심과 사랑을 주시는 것 같아 기회가 된다면 살아갈 날이 많기에 언젠가 (헐리우드에)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배우들의 제일 큰 장벽은 언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선균은 “저도 (영화 속 기택처럼) 큰 계획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이번에 (시상식 참석 후) 느낀 것은 연초마다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여정 역시 “저는 한국말로 하는 연기도 어려운 사람”이라며 “헐리우드 진출은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다. 저도 한국에서 좋은 작품을 많이 해야겠다는 바람이 더 크다”라고 밝혔다.
연교 역의 조여정은 헐리우드 러브콜에 대해 겸손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사진=고성준 기자
장혜진은 “저는 한국에서도 화보를 찍어본 적이 없어서 한국 화보부터 찍어보고 싶다. (하지만) 외국에서도 제의가 온다면 안 할 이유가 없다”며 “오브 콜스, 와이 낫?”을 말해 취재진에게 웃음을 안겼다. 이어 박명훈도 “저도 영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알아 듣지도 못하고 얘기도 못했다”며 “화보나 여러 가지는 조용히 숨어서 진행하고 있었다. 헐리우드(진출)도 조용히 추진을 해보려고 한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있다가 살짝 나타날 테니 기대해달라”며 농담을 던졌다.
이 가운데 송강호는 튀는 답변으로 좌중을 폭소케 했다. 그는 “저는 헐리우드가 아니라 국내에서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작년 1월말 이후, 13개월째 아무런 일이 없다. 국내에서 일이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 ‘기생충’은 전원 백수인 기택네 장남 기우가 고액 과외 면접을 위해 박사장네 집에 발을 들이면서 시작된 두 가족의 만남이 걷잡을 수 없는 사건으로 번져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난 2월 10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헐리우드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국제영화상, 각본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박 사장 역의 배우 이선균은 영어 공부에 대한 결심을 밝혀 취재진을 웃게 만들었다. 사진=고성준 기자
앞서 지난해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도 한국 최초 황금종려상을 받는 등 ‘기생충’의 발자취는 모두 ‘최초’라는 이름표가 따라 붙는다. 실제로 이 같은 수상 행진은 101년 한국 영화 역사 전체를 훑어봐도 최초의 일이다.
여기에 더해 외국의 자본 없이, 오로지 한국인과 한국어로만 이뤄진 한국 영화가 칸과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동시에 최고 작품상을 받은 사례는 세계 영화 역사상 최초이기도 하다. 그만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단순한 영화 작품 그 이상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됐다.
그렇다면 봉준호 감독이 생각하는 ‘기생충’의 상징성과, 그에 따른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봉 감독은 “(영화에) 우스꽝스럽고 코미디스러운 면도 있지만 현대사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쓰라린 면도 있었다. 그걸 1센티미터라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엔딩에 이르기까지 정면돌파해야 했던 것“이라며 ”어쩌면 그 부분을 관객이 불편해 할 수도 있겠지만 두려움으로 당의정을 입혀 달콤한 장식을 하며 영화를 끌고 가고 싶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마이크 잡는 모습만 봐도 흐뭇해“ 영화 ‘기생충’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소담, 송강호, 봉준호. 사진=고성준 기자
이처럼 어쩌면 관객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우려는 예기치 못한 전세계 관객들의 호응에 가려졌다. 이에 대해 ”한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베트남, 일본, 영국에서도 오스카와 상관없이 이미 북미에서도 역대급 기록을 써나가고 있는 것이 기뻤다“며 ”왜 그렇게 호응을 해줬는지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분석해야 할 것 같다. 다만 그것이 저의 업무는 아닌 것 같다. 저는 이미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뚜벅뚜벅 걸어가겠다. 많은 평론가, 관객이 평가해주실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세계의 호응은 국내에선 정치권의 영향으로 인해 다소 미묘한 전개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봉준호 생가를 복원하자’는 정책을 내세우는 후보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어 논란을 낳기도 했다. 이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저도 기사를 봤다. 동상과 생가…예, 그런 이야기는 제가 죽은 후에 해주셨으면 한다“며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가리라’라고 생각하고 있다. 딱히 그것에 대해 할 말은 없다“고 웃으며 일축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는 전 세계 250개 매체, 약 500여 명의 기자들이 모여 ‘기생충’을 향한 뜨거운 취재 열기를 실감케 했다. 영화 ‘기생충’은 오는 26일 흑백버전으로 국내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봉준호 감독은 ‘흑백버전 기생충’에 대해 ”디테일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