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타이거즈는 미국 플로리다에 2020시즌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스프링캠프를 떠나는 팀은 주로 ‘미국파’와 ‘일본파’로 분류됐다. 올해는 다르다. 지난해 중순부터 한일관계가 경색되고 대중의 반일감정이 거세지면서 한국 구단들도 ‘민심’에 발을 맞췄다. 줄줄이 예정됐던 일본 캠프를 취소하고 새로운 둥지를 찾았다.
그 결과 미국 애리조나(한화 이글스·NC 다이노스·KT 위즈)와 플로리다(SK 와이번스·KIA 타이거즈), 호주 시드니(LG 트윈스·롯데 자이언츠)와 질롱(두산 베어스)이 새 주류를 이루었다. 일본 오키나와 온나손 훈련 시설에 이미 수십억 원을 투자한 삼성 라이온즈와 가까운 대만에 새 훈련장을 찾은 키움 히어로즈만 아시아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뿐 아니다. 이전에는 미국에서 훈련한 팀들도 2월 20일 이후 일본 오키나와로 건너와 한국 팀들끼리 연습경기로 실전 감각을 끌어 올린 뒤 귀국하는 일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일본에 2차 캠프를 차리는 팀이 두산(23일·미야자키)과 LG(26일·오키나와)밖에 없다. 매년 2월 말과 3월 초에 벌어지곤 했던 ‘오키나와 리그’가 사실상 해체된 셈이다.
#프로야구 초창기 스프링캠프는 어땠나
메이저리그 문화나 용어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과거에는 ‘스프링캠프’라는 단어가 보편화되지 않았다. ‘전지훈련’이라는 일본식 표현을 주로 썼다. 그러나 해외 캠프는 사실 프로야구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2년 6개 구단 체제로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다음 시즌인 1983년부터 해외로 합동훈련을 떠나기 시작했다. 4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선 추운 겨울에 프로 선수들이 체계적으로 몸을 만들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구단들은 따뜻한 나라에서 훈련 효과를 높이는 동시에 선수들이 팀워크를 다지고 사기를 끌어올리기를 원했다. 또 미국, 일본 같은 해외 선진 구단과 교류해 더 높은 차원의 야구 기술을 익히려는 목적도 있었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프런트가 챙겨야 할 일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선수별로 필요한 서류가 10개는 넘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선수단 지원부서 전원이 3개월 이상 매달려 준비해야 할 정도. 특히 해외에 나가려면 선수 전원이 서울 남산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가서 소양 교육을 거쳐야 했다. 신원조회 역시 필수. 군미필 선수들은 병무청으로부터 해외여행 허가를 받는 절차도 거쳤다. OB 베어스는 선수단 전체가 미국 비자를 받는 게 너무 어려워 미국 캠프를 포기하기도 했을 정도다.
다만 초창기 선수들의 스프링캠프는 요즘과 같은 효과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에도 12월과 1월이 비활동 기간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몸 관리의 중요성을 미처 몰랐던 선수들이 두 달 동안 정말 ‘휴식’만 취하다 캠프에 왔기 때문이다. 2월 1일에 훈련이 시작돼도 훈련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려면 일주일이 그냥 흘러갔다.
특히 투수들은 캠프 초반에 전력으로 공을 던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요즘 투수들이 캠프 첫날부터 불펜 피칭을 시작하는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야수들 역시 술과 과식으로 불어난 체중을 캠프에 와서야 빼기 시작했다. “선수단 전체가 훈련다운 훈련을 하려면 2월 하순은 돼야 했다”는 게 야구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 때문에 한국 선수들은 일본 스프링캠프에서 망신도 많이 당했다. 일본 1군도 아닌 1.5군 선수들과 연습경기에서 힘도 못 써보고 압도당하는 일이 잦았다. 일본 선수들은 당시에 이미 요즘의 한국 선수들처럼 완벽하게 준비된 몸으로 캠프를 시작하곤 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실력 차도 원인이었지만, 이제 갓 프로로 걸음마를 뗀 한국 선수들의 몸 상태와 더딘 훈련 페이스도 영향을 미쳤다.
NC 다이노스는 이번 시즌 일본 오키나와를 벗어나야 했던 다른 팀들과 달리 미국 애리조나에 2년 연속 캠프를 차렸다. 사진=이영미 기자
#첫 번째 해외 스프링캠프의 풍경
1983년 가장 먼저 해외 스프링캠프를 떠난 팀은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OB(두산의 전신)였다. 당시 새로 개장했던 이천구장 실내훈련장과 그라운드에서 기초 체력훈련을 하다 그해 1월 30일에 대만 가오슝으로 떠났다. 또 2월 24일부터 3월 4일까지는 일본 후쿠오카와 미야자키에서 2차 캠프를 했다.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인 난카이 호크스와 연습경기를 치르면서 처음으로 일본 프로선수들과 맞대결을 경험하기도 했다.
해태 타이거즈(KIA의 전신)는 1983년 김응용 감독을 맞아들이면서 2월 4일부터 26일까지 3주가량 일본 오사카와 고치 전지훈련을 진행했다. 오릭스 버팔로스의 전신인 한큐 브레이브스와 친선경기도 치렀다.
삼성은 2월 10일부터 3월 14일까지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 달 넘게 스프링캠프에 임했다. 롯데는 기간이 짧은 대신 내실을 다졌다. 2월 14일부터 2주 동안 일본 가고시마에서 자매구단인 롯데 오리온스와 합동훈련을 진행했다. 일본 선수들의 훈련을 직접 옆에서 지켜본 게 큰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원년 6개 구단 가운데 해외에서 훈련하지 못한 두 팀은 삼미 슈퍼스타즈와 MBC 청룡(LG의 전신)이다. 삼미는 당초 해외 스프링캠프 계획을 세웠다가 나중에 취소하고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선수들의 훈련 장소를 만드는 고육지책을 썼다. 스카우트 비용에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예산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프로 첫 해 꼴찌를 한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천 야구의 대부인 김진영 감독을 맞아 들였고, 재일교포 선수인 장명부를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몸값이었던 연봉 1억 원에 영입했다. 국가대표 출신 투수 임호균, 포수 김진우, 내야수 이선웅까지 선수 13명도 새로 데려와 지출이 적지 않았다. MBC는 아예 처음부터 엄두도 내지 않았다. 한국에서 그나마 따뜻한 경남 진해로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각 구단이 첫 해외 스프링캠프에 지출해야 했던 돈은 구단별로 6000만 원에서 1억 2000만 원 사이로 알려져 있다. 수십억 원을 쓰는 요즘과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구단 운영비가 그리 많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꽤 큰 액수였다. 그나마 전지훈련 기간도 지금보다 훨씬 짧고 참가 인원도 적었기에 이 정도 비용으로 충당이 가능했다.
이듬해인 1984년에는 일본과 대만 위주였던 훈련 장소에 변화가 생겼다. 롯데가 처음으로 괌의 초청을 받아 현지에 스프링캠프를 차리면서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특히 롯데는 이때 괌에서 일본 최고의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꼭 요미우리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롯데는 그해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해 스프링캠프에 대한 투자금을 제대로 회수했다.
#일본에서 배우고 미국에서 충격받다
한국 프로야구는 맨 처음 일본 프로야구를 교본으로 삼았다. 실업야구에서 막 벗어난 한국 야구가 하루아침에 그럴 듯한 프로리그로 자리매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기량과 훈련 방식은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구단 운영도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프로야구 초창기의 해외 캠프는 선수들과 구단 프런트 모두 선진 야구를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일단 스프링캠프에서 직접 지켜본 일본 프로선수들의 훈련 방식이 충격적이었다. 잠시도 쉴틈 없이 이어지는 지옥훈련과 체계적인 훈련 스케줄, 완벽하게 준비된 선수들의 몸 상태는 물론 한국과 비교도 할 수 없이 풍부하게 갖춰진 훈련 시설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또 연습경기에서 지켜본 일본 투수들의 정교한 제구와 타자들의 정확한 타격, 야수들의 완벽한 수비 능력 등이 국내 선수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이 때문에 한국 야구는 일본의 야구 용어뿐 아니라 훈련법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일본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좋은 부분을 흡수하려 애썼다.
그런 한국 프로야구 캠프 역사에 새 지평이 열린 것은 1985년이었다. 삼성이 가장 먼저 야구의 본고장 미국으로 떠났다. 삼성은 당시 이건희 구단주가 엄청난 투자와 애정을 쏟아 부었음에도 1982년과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패해 아쉬움을 삼켰다. 급기야 구단주 지시 아래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 LA 다저스가 스프링캠프를 치르는 플로리다 베로비치로 날아갔다. 이 구단주가 1982년 10월 다저스 구단주를 직접 만난 자리에서 약속을 받은 덕분이다.
처음에는 고생스러웠다. 직항으로 가도 먼 거리인데 심지어 세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고 나서야 겨우 베로비치에 도착했다. 선수들은 생소한 장거리 비행이 끝나자 녹초가 돼 곯아 떨어졌다. 한국과 정반대로 바뀐 시차에 적응하는 것도 난제였다.
그러나 일단 훈련이 시작되자 모든 게 달라졌다. 일본 구단들의 캠프를 보고도 놀랐던 한국 선수들에게 메이저리그 캠프는 더 큰 문화적 충격을 안겼다. 넓디넓은 잔디 위에 큼직한 야구장 4면이 펼쳐져 있는 것부터 8개의 배팅훈련장과 최첨단 시설의 웨이트트레이닝장이 갖춰져 있는 것까지, 단지 선수들의 캠프만 위해 만들어진 훈련 전용 시설들이 감탄을 자아냈다.
훈련방식도 달랐다. 이전까지 한국 지도자들과 선수들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본식으로 지옥훈련을 하는 게 진정한 프로 정신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메이저리거들은 오전에 모든 훈련 스케줄을 끝내고 오후에는 자율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다저스 코치들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았던 삼성 선수들이 오히려 “훈련이 성에 차지 않는다”며 당황해할 정도였다. 결국 야간에 조명을 켜놓고 추가 훈련을 하려다 플로리다의 모기떼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지도방식도 달랐다. 삼성 선수들에게 다가온 다저스 코치들은 고급 기술을 전수하는 대신, 기본적인 자세만 알려준 뒤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삼성 입장에서는 다저스 캠프에서 보내는 귀한 2주의 1분 1초가 아까운데, 코치들은 선수들에게 야구에 대한 철학과 ‘왜’를 묻고 토론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많은 야구 관계자들은 “당시 다저 타운에서 보낸 스프링캠프가 이후 삼성이 명문구단으로 자리 잡는 초석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삼성은 그해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모두 우승해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또 삼성 지도자들과 선수들이 직접 체험하고 지켜본 다저스의 훈련 방식과 전술, 전략이 전성기 삼성 야구의 근간을 이뤘다. 이후 많은 구단이 점차 일본을 넘어 미국으로 스프링캠프지의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한 해 운영비의 10%를 지출하는 캠프의 중요성
‘시즌 준비’가 한 해 농사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실감한 구단들은 그만큼 스프링캠프에 투자를 많이 하기 시작했다. 점점 참가 인원이 늘어나면서 캠프에 쓰는 비용도 어느덧 10억 원을 훌쩍 넘긴 지 오래다. 보통 구단 운영비의 10%가량이 1군 스프링캠프에 들어간다. 그해 미국 달러화와 일본 엔화 환율에 따라 훈련 일정과 인원을 조금씩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아무래도 숙박비와 식비로 가장 많은 돈을 쓴다. 선수들이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는 게 훈련 능률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다. 한 구단 운영팀 관계자는 “캠프 전체 비용의 70%가 숙식비라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에 훈련 보조요원과 지원 프런트를 합하면 70여 명이 캠프를 떠나는데, 이 많은 인원이 40일 넘게 호텔에 머무르려면 엄청난 돈이 드는 게 당연하다. 감독과 외국인 선수, 일부 베테랑 선수를 제외하면 모두 2인 1실을 쓰는데도 그렇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식사비 역시 만만치 않다. 아침과 저녁에 하루 두 끼를 모두 숙소에서 먹고, 점심식사는 대부분 인근 한식당과 계약해 야구장으로 직접 공수한다. 이밖에도 김치 구입을 위한 부식비가 따로 책정된다. 500만~700만 원 정도다. 현지 호텔이 선수단에 김치를 제공하더라도 맛이 한국산과 확실히 다르다. 출발 때부터 엄청난 양의 김치를 사서 현지로 가져간다.
그 다음으로 돈이 많이 들어가는 부분이 항공료다. 특히 미국에서 일본으로 한 차례 훈련지를 옮겼던 구단들은 도중에 이동하는 왕복 항공료를 포함해 1억 원이 훨씬 넘는 돈을 써야 했다. 현지에서 선수들이 사용하는 버스 대여비와 기름값도 예산에 포함된다. 야구장 역시 미국과 일본 구단의 전용 훈련장에 임대료를 내고 빌려 쓴다. 그 공간을 확보하는 경쟁도 치열하기는 마찬가지다.
미국 스프링캠프에 훨씬 더 많은 돈이 들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미국은 왕복 항공료가 비싼 대신 식비가 일본보다 덜 들고, 일본은 항공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반면 식비로 더 많은 돈을 쓴다. 또 다른 구단 운영팀 관계자는 “일본은 음식 값이 비싸서 호텔 뷔페식 저녁식사가 1인당 5000~6000엔이다. 단체 할인을 적용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2군 선수들에게도 해외 캠프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 역시 2012년 삼성이 가장 먼저 시작했다. 1군 선수들이 괌 캠프를 마치고 오키나와로 이동하자 대구에 있던 2군 선수들을 괌으로 보내 따뜻한 곳에서 훈련을 이어가게 했다. 삼성은 당시 “2군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프로로서 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했다.
이듬해인 2013년엔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와 SK가 대만으로 2군 선수단을 보냈다. 이후 미국이나 일본보다 체류 비용이 덜 들고 날씨는 더 따뜻한 대만이 2군 캠프의 새로운 성지로 자리 잡았다. 2014년엔 LG 두산 KIA 2군이 동참했고, 2015년엔 롯데도 2군을 대만으로 파견했다. 또 NC는 아예 2군 선수들을 1군 선수들과 같은 미국으로 보냈고, 한화는 삼성과 같은 방식으로 1군이 고치를 떠나면서 2군과 배턴 터치를 하는 방법을 썼다. 그 덕분에 2군 선수들도 진짜 ‘프로’다운 마음으로 훈련할 수 있게 됐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