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리정혁, 윤세리 커플만큼 구승준, 서단 커플에도 관심을 보였다. 친구의 말이 김정현의 구승준 연기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단다. 그렇게 멋진 구승준을 왜 죽였냐고 안타까워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생뚱맞게 그렇게 받아치는 나를 보면서 나도 놀랐다. 구승준이란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왜 그럴까 싶었다. 서단을 향한 구승준의 사랑의 언어는 나중엔 달라졌지만 대체로 2인칭 혹은 3인칭이다.
“서단 씨는 예뻐요, 여신 같고!”
너는 아름답다, 너는 우아하다, 너는 멋있다, 그대는 토라진 모습까지 귀엽다, 그런 언어는 일반적으로는 바람둥이들의 어투다. 나는 그런 언어로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나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가는 사람의 사랑은 믿지 않는다. 물론 구승준의 사랑의 언어가 계속 2인칭, 3인칭에 머물렀다는 뜻은 아니다. 그랬다면 감히 목숨 걸고 사랑하는 이를 지켰겠는가.
진실한 사랑의 언어는 1인칭이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바로 리정혁의 사랑의 언어가 그랬다. 그래서 강렬하다. 윤세리를 보호하러 목숨 걸고 서울로 들어왔지만 북한의 특수부대 장교인 리정혁은 때가 되면 자기 세상인 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한치도, 한순간도 잊어버리지 않는 자기의 처지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소주잔을 기울이며 사랑 고백을 한 그 명장면은 그의 1인칭 사랑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 가기 싫다고, 안 가고 싶다고, 그냥 당신이랑 여기 있고 싶다고… 여기서 당신이랑 결혼도 하고, 당신 닮은 아이도 낳고, 보고 싶소. 당신 흰머리 나는 거, 주름도 생기고 늙어가는 거… 그리고 다시 할 거야, 피아노!”
사랑은 신이다. 사랑하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와 함께 온 우주가 공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윤세리처럼 바람이 부는 이유까지 알게 되는 것이다. 바람은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혹은 머무르기 위해 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기 위해 부는 것이다. 그 바람이 불어야 바람을 타고 날아가 착지할 수 있다. 물론 그 착지는 불시착일 수도 있다. 불시착은 의도하지 않아 불시착인 거지만, 어디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생이 있던가. 바람을 타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불시착하듯 의도하지 않는 곳에서 생은 또 그 매듭을 푼다.
바람을 따라 사랑을 배우고 생을 배우다 보면 알게 된다. 사랑이 언제나 행복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행복을 꿈꾸며 선택한 사랑이 종종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사랑이, 순수한 사랑이 신인 이유는 거기서 그 모든 고통을 견딜 힘이, 나도 몰랐던 그 힘이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윤세리와 리정혁만 보였다면 드라마를 기다리며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리정혁의 부하들, 그들만 나오면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체주의인지, 공동체인지 헷갈리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인간애를 발휘하며 서로서로 돕고 살아가는 사택마을 여인들을 보다 보면 정으로 살던 옛날 우리네 정서가 새롭다. 처음 들었어도 단박에 이해가 되는 구수한 북한말이, 체제는 믿을 수 없어도 그 속에서도 속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정서들이 예전에 우리 농경사회의 정서 아닌가.
국정원 직원이 오작교가 되고, 북한 군인들이 사랑의 감초가 되는 일이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꿈은 자유다.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