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앞두고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민주당 안팎에선 민주당 계열 비례정당 창당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2월 20일 더불어민주당 ‘대한민국 미래준비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 및 1차회의에 참석한 이낙연, 이해찬 상임선대위원장, 이인영 원내대표(왼쪽부터). 사진=박은숙 기자
4·15 총선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비례정당’이다. 지난해 12월 개정된 공직선거법에 따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처음 도입돼 각 당마다 비례대표 의석수 계산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은 선거법 통과 직후부터 비례정당 창당을 언급했고, 실제 ‘미래한국당’이라는 비례정당을 만들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다양한 정책과 이념에 기반한 군소정당의 의회 진출을 촉진한다’는 선거법 개정 취지에 어긋난다며 비례정당 설립은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위기감에 휩싸인 민주당 안팎에선 진보진영 계열의 비례전용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원칙·명분을 앞세우기보단 일단 선거에서 이기고 보자는 분위기다.
문재인 대통령 복심으로 불리는 윤건영 전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은 2월 21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장기적으론 원칙의 정치가 꼼수 정치를 이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선 민심이 왜곡될 우려가 있다”며 “비상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판단해야 한다”고 비례정당 필요성 운을 띄었다.
민주당 출신 무소속 손혜원 의원도 유튜브를 통해 “민주당의 위성정당이 아닌 민주시민들을 위한, 시민이 뽑는 비례정당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제가 직접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니 관련된 분들과 함께 의견을 모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려 한다”고 창당을 시사했다. 정봉주 전 의원이 비례정당 창당에 참여할 것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민주당 출신의 무소속 손혜원 의원이 본인의 유튜브 등을 통해 민주당 계열 비례정당 창당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사진=유튜브 손혜원TV 캡처
이에 대해 당 공식입장은 “개인 의견일 뿐” “검토한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 지도부 내에서도 외곽지지 세력에 의한 비례정당 창당 가능성을 염두에 둔 발언이 나왔다. 이인영 원내대표는 2월 23일 “만들 수 없다는 기본 입장에 변함없다”면서도 “여러 의병이 (위성정당을) 만드는 것을 말릴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밝혔다.
정치권에선 비례정당 발언이 청와대나 당 지도부 의중이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도 감지된다. 공교롭게도 친문 인사들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미래통합당 한 핵심 관계자는 “친문진영 인사들이 비례정당 창당 필요성을 언급하며 여론을 살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사회단체 중심으로 뭉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긴 힘들다”며 “당 차원에서도 비례정당 창당 마음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처럼 비례정당은 절대 없을 것이라던 민주당 기류가 바뀐 것은 총선을 앞두고 원내 과반 확보는커녕, 1당을 뺏길 수 있다는 현실적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근형 전략기획위원장은 2월 24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후 “심각하다. 이 상태로 가면 비례에서만 20석 차이를 안고 들어가는 상황이 될 것 같다”고 토로했다.
민주당 계열의 비례정당이 만들어질 경우 더 많은 수의 비례대표를 확보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오히려 역풍을 맞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주당은 그동안 미래통합당의 비례정당 미래한국당에 대해 ‘꼼수 정당’이라고 비판해왔다. 그런데 이제와 비례정당을 창당하면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4+1 협의체의 선거법 통과에 대한 방어수단으로 미래통합당이 창당한 미래한국당과는 성격이 다르다. 민주당은 선거법을 개정한 뒤 본인들이 희생하는 법안을 만들었다고 홍보해왔다”며 “그런데 이제 와서 총선 패배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자 비례정당 창당 가능성을 거론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2월 5일 열린 미래한국당 중앙당 창당대회에 참석한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왼쪽)와 한선교 미래한국당 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4+1 협의체’였던 정의당 등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다. 앞서 20대 국회 막판 진통을 겪은 선거법과 공수처설치법, 유치원3법 등 주요 법안에 대한 의결 처리는 ‘4+1 협의체’의 공조 덕분에 가능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총선을 앞두고 비례정당을 만들면 그 공조는 깨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여권은 문재인 대통령 임기 후반 국회 운영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2월 24일 국회에서 열린 상무위원회의에서 민주당 계열 비례정당 창당 가능성에 대해 “정의당은 미래한국당에 대한 (민주당의) 우려를 이해하지만 같은 방식의 맞대응으로는 수구세력의 꼼수정치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지난 20년간 정치개혁을 위한 선거법 개정 노력과 개혁의 대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치권에선 4+1 협의체 차원의 비례정당 창당 방안도 거론되지만 후보자 등록 신청 기간 등 총선까지 남은 날짜를 계산했을 때 불가능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수도권의 한 민주당 의원은 “4월 총선에 비례정당 후보를 내려면 3주 안에 당을 창당해 후보 공천까지 마쳐야 한다. 민주당 중심으로 해도 쉽지 않다”며 “민주당과 정의당, 민생당 등이 모여 이해관계를 다 맞춰 비례정당을 낸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전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