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 펀드 판매사 공동대응반이 ‘선 배상 후 구상권 행사’ 방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실행에 옮길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공동대응반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판매사 공동대응반은 은행권을 중심으로 지난해 10월 구성됐다. 우리·신한·하나·부산·경남 5개 은행과 신한·대신·메리츠·신영·삼성·KB·NH·한국·미래에셋대우·유안타·한화 11개 증권사가 정기적으로 만나 자체적으로 실사를 하고, 라임 사태 대책 마련을 위해 의견을 교환해 왔다.
투자자들의 손실 배상은 라임 사태에서 가장 큰 축이다. 현재 라임이 환매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판매사들이 먼저 배상을 하면 1조 원대에 달하는 투자자 손실이 줄고, 시장 혼란이 보다 빠르게 정리 될 수 있다. 한 공동대응반 관계자는 “결론을 내릴 단계는 아니지만 고객 손실 최소화를 우선으로 두고 논의하고 있다”며 “오는 3월께부터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2019년 10월 14일 원종준 라임자산운용 대표가 펀드 환매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판매사들 달라진 기류, 왜?
그동안 판매사들은 줄곧 ‘상품을 구입 했는데 내용물에 문제가 있었다면 판매사가 아닌 제조사가 책임져야 한다’며 배상 책임은 라임에 있다고 강조해왔다. 펀드 내용은 물론 라임의 펀드 간 자전거래 등을 통한 수익률 돌려막기 등의 상황을 제대로 전달 받지 못했다며 판매사 역시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라임을 형사고소하고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는 등 강경한 법적 대응도 예고했다. 실제 공동대응반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라임에 대한 삼일회계법인 실사 결과가 나오면 곧바로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선 라임을 상대로 한 강경 대응이 실익이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것으로 전해졌다. 법적 대응을 위한 기초 사실관계인 구체적인 손실액과 라임의 환매 계획 등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이번 사태의 핵심 인물인 이종필 전 라임자산운용 부사장은 검찰 수사 도중 도주했다. 금감원 실사 결과와 그에 따른 환매·관리 계획 등이 오는 3월에나 나올 예정인 만큼, 판매사들이 소송을 내면 오히려 펀드 정상화나 투자자 손실 회복 문제 등이 더 복잡하게 꼬일 것이란 지적이 나왔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속도를 내고 있는 분쟁조정 작업도 판매사들의 기류를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다. 앞서 금감원은 지난 2월 14일 라임에 대한 중간 검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펀드 불완전판매 분쟁조정을 위한 사실 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조사 결과 라임과 신한금융투자가 무역금융펀드(플루토 TF-1호)의 부실을 인지하고도 이를 은폐해 사기혐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금감원은 라임과 신한금투를 검찰에 수사 의뢰했고, 불법행위가 상당 부분 확인된 무역금융펀드를 중심으로 분쟁조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분쟁조정은 운용사 문제가 아닌 판매사와 투자자 간의 분쟁을 다룬다. 라임펀드를 판매한 판매사들은 불완전판매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피해를 주장하는 투자자들은 라임 펀드를 판매한 은행과 증권사로부터 펀드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고, TRS(총수익스와프)도 이번 사태가 불거지면서 처음 알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판매사들은 투자자 정보를 조작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앞서 판매사들은 법적으로 운용사와 판매사 간의 정보 교류를 금지(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45조와 시행령 등)하고 있어 펀드 부실을 알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불완전 판매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미리 알 수 있었으면 애초에 팔지 않았을 것이란 주장이다. 그러나 펀드 구성과 운용 정보는 1개월이 지나면 교류할 수 있고, 최근 일부 판매사들 내부에서 부실에 대한 경고음이 수차례 나왔지만 라임의 환매 중단 직전까지 펀드를 판매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앞서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사기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도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2월 19일 신한금투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27일 대신증권, 우리은행, KB증권 등 은행과 증권사로 강제수사 범위를 확대했다. 검찰은 은행과 증권사가 라임 펀드의 부실을 확인하고서도 고객들에게 알리지 않고 판매했는지 등을 확인하고 있다.
#판매사들 이해관계 ‘복잡’
다만 판매사들이 ‘선 배상 후 구상권 행사’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고려해야 할 사안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판매사들의 선 배상이 거론되면서 얼핏 DLF 사태 당시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이 빠르게 대처했던 모습을 겹쳐 보는 시선이 있지만, 라임 사태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는 게 금융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DLF는 은행들의 내부 통제 실패 및 불완전판매가 명확했다. 은행들이 경영진 연루 여부를 떠나 빠르게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에 나선 이유”라면서 “하지만 라임 사태에선 판매사들이 공동대응반까지 구성해 한 목소리로 과실과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오히려 섣불리 배상에 나서면 ‘배임 리스크’가 생기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구상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실제로 판매사들이 투자자들에게 배상한 금액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라임은 상환 여력이 없고, 라임 펀드가 자전거래 형식인데다 정상 판매 대금이 문제가 된 펀드의 환매용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어 권리 주장도 쉽지 않다. ’사기 공범’으로 지목된 신한금투에도 구상권을 행사하는 방안이 거론되지만, 신한금투는 사기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만약 법원에서 혐의가 인정 된다고 하더라도 신한금투의 책임 소재를 처음부터 다시 따져봐야 하는데다 배상에 쓴 금액 전액을 청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판매사들 간의 이해관계도 제각각이다. 대표적으로 라임에 TRS 대출을 제공한 증권사들이 대출금 우선상환권을 주장하면서 다른 판매사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는 점이 꼽힌다. 라임과 TRS 계약을 맺은 증권사는 신한금투·KB증권·한국투자증권으로, 계약 금액은 6700억 원이다. 이 계약에서 앞서의 증권사 세 곳은 펀드 청산 시 우선변제권을 갖는 1순위 채권자다. 이들이 펀드에서 자금을 빼가면 다른 투자자들은 거기서 남은 돈으로 분배해야 한다.
대신증권이 최근 라임과 TRS 계약을 맺은 증권사들에게 내용증명을 보내 자금을 먼저 빼가지 말라고 요구하며 내용증명을 보냈지만 이들 증권사는 회신하지 않았다. 계약상 우선변제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자사 주주에 대한 배임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TRS 계약 맺은 증권사들 외에도 라임 펀드를 많이 판매한 은행들은 판매액 비율대로 나누자고 말하고, 반대로 판매 규모가 작고 문제가 없는 펀드를 팔았던 곳들은 자신들이 먼저 돌려받아야 한다고 말한다는 등 입장이 제각각”이라며 “배상과 구상권 행사, 라임 자산 활용 등은 한 몸처럼 얽혀 있어 따로 떼고 고려할 수 없다. 배상 논의는커녕 향후 판매사들 간의 소송전까지 벌어져 복마전 양상을 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