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우리금융그룹 본사. 최준필 기자
우리금융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는 2019년 12월 손태승 현 회장을 차기 회장 단독후보로 추천했다.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로 연임 가도에 적신호가 켜진 데다 DLF 투자 피해자들과 시민사회가 손 회장 연임을 반대했음에도 우리금융 임추위는 손 회장의 연임 일정을 강행한 것이다. 더욱이 앞서 금융당국이 DLF 사태의 책임을 물어 우리은행에 강한 제재를 예고한 터다. 하지만 임추위는 차기 회장을 조기에 선임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금융당국의 제재가 결정되기 전에 절차를 마무리한 것이다.
또 우리금융 이사회는 지난 3일 임시회의를 열고 손 회장 연임 안건을 오는 25일 주주총회에 상정할 것을 확정했다. 해당 안건이 주총에서 통과되면 손 회장은 차기 회장으로서 임기를 이어갈 수 있다.
손태승 회장은 지난 1월 금융감독원(금감원)의 문책경고를 받았다. 중징계인 문책경고를 받으면 3년간 금융사 임원으로 선임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금융 이사회는 금감원의 결정 직후에도 손 회장 연임에 힘을 실어줬다. 금융위원회(금융위)도 지난 4일 정례회의를 열고 손 회장에 대한 문책적 경고와 우리은행에 대한 기관제재를 확정했다. 이와 같은 효력은 금융당국이 제재 결과를 회사로 일괄 통보하는 시점부터 발생한다. 우리금융은 금융위 제재 결정 하루 전인 지난 3일 이사회를 열고 손 회장 연임 의지를 공식화했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은 “제재심 확정을 하루 앞두고 우리금융이 이사회를 통해 대놓고 금융당국의 제재를 비웃었다”며 “이사회는 중징계를 받아 3년간 금융회사에 취업할 수 없는 손 회장 연임을 결정했다. 이런 노골적인 행위는 금융당국이 금융자본의 민원 해결에만 급급해 최소한의 리더십도 상실한 것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우리금융의 한 사외이사는 “이사회에서는 손 회장 제재 리스크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지도 않았다. 손 회장 본인이 중징계 받을 사안이 아닌데 부당하다고 소송까지 한다고 하니 이사회에서 이를 받아들였다”며 “물론 리스크가 있고 금융당국과 척을 지는 게 부담은 되지만 금감원이 징계를 준다고 금융사가 이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계는 이제 변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신한 조 회장 연임 서두르기
신한금융그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은 신한은행의 채용비리와 관련해 업무방해 등 혐의로 기소돼 지난 1월 22일 1심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조 회장은 1심 선고가 끝난 직후 “결과가 아쉽다”며 “항소를 통해서 공정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노력하겠다”며 불복의 뜻을 밝혔다.
1심이 끝난 후 신한금융 이사회도 조용병 회장의 연임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다. 신한금융은 내부 규범상 금고 이상 형사처벌을 받고 집행이 끝난 지 5년이 지나지 않으면 경영진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신한금융 이사회는 “대법원 선고까지 나와야” 한다며 조 회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서울 중구 신한은행 본사. 박정훈 기자
더욱이 신한금융은 회장추천위원회(회추위)를 예년보다 한 달 정도 일찍 열어 조 회장의 연임을 서두르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조 회장 1심 선고가 나오기 전인 2019년 11월 신한금융 회추위는 첫 회의를 열었으며, 일정 등 회장 선임에 관한 중간 과정은 모두 비공개로 했다. 결국 회추위는 2019년 12월 조 회장을 차기 회장 후보로 추천했다. 회추위는 “조 후보가 대표이사 회장으로서 요구되는 조직관리 역량, 도덕성 등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회장 추천 과정을 두고 신한금융 내부에서도 반발이 컸다. 당시 신한은행 한 고위 관계자는 “조 회장은 1년 넘게 재판을 준비하느라 경영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며 “회추위는 금융지주에서 제공하는 정보만 보고 사안을 판단한다. 선고가 나오기도 전에 급작스럽게 회추위를 비공개로 여는 건 조 회장을 밀어주는 것밖에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금융지주사 버티기 행보 왜?
금융회사 임직원은 다른 직종과 달리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정작 금융사 최고경영자(CEO)는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으로 유죄 판결이나 금융당국의 제재를 받고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문제가 발생하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오너 회사 총수들과 비교해도 이해하기 힘든 행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금융업계에서는 이 같은 행보의 원동력이 사외이사제도에 있다고 보기도 한다. 금융회사의 사외이사는 일반 기업의 사외이사보다 훨씬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금융지주는 일반 기업과 달리 지배구조상 지배주주가 뚜렷하지 않아 주인 없는 회사의 특성을 보인다. 그렇다보니 회장과 은행장 등 고위급 인사를 결정하는 이사회는 ‘킹메이커’ 역할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외이사가 현 경영진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독립성을 유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금융권 사외이사들이 매번 ‘거수기 역할’을 한다는 지적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고동원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금융회사 사외이사가 독립적으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반면 금융당국의 제재를 무조건 따라야 하느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현행법상 금융사에 적용되는 은행법이나 지배구조법에는 금융사 내부통제 문제에 대한 CEO나 이사회의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다. 법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금융권 일각에서는 수위가 높아지는 금융당국의 제재에 ‘과도한 개입’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금융당국의 제재가 자칫 관치금융으로 흘러 금융시장을 퇴보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금융사별로 사고에 대처하는 방법은 다르다. 대표이사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경영진이 버티는 곳도 있다”며 “무엇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금융당국 제재가 회사별로 다른 잣대로 적용되어선 안 된다. 관치 논란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제재근거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동원 교수는 “금융당국이 제재를 하면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