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가 3월 4일 국회 정론관에서 박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를 대독 후 자필 편지를 취재진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서로 간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메우기 힘든 간극도 있겠지만,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기존 거대 야당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들었던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주실 것을 호소드립니다.”
3월 4일 유영하 변호사가 공개한 박 전 대통령 편지 마지막 부분으로, 핵심 내용이다. 총선을 앞두고 1야당인 미래통합당 지지를 호소한 것으로 풀이된다. 박 전 대통령은 편지를 직접 썼을 뿐 아니라 발표 시기까지 고른 것으로 전해진다. 그동안 보수 일각의 지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고수하던 박 전 대통령이 편지를 공개하자 정치권 역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박 전 대통령은 소수 측근들 외엔 만나지 않고 있다. 앞서 편지를 공개한 유 변호사도 그중 한 명이다. 박 전 대통령은 이들과 만나 정치 얘기는 거의 하지 않고 주로 외교 문제와 관련된 얘기들을 많이 나눴다고 한다. 특히 대일관계 악화 부분을 우려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정치인들의 공천 등 총선에 대해 관심을 나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대통령과 접촉을 하고 있는 한 친박 원로 말이다.
“(박 전 대통령이) 편지를 쓰고, 또 공개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아직 재판 중인데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보수진영이 분열하면 문재인 정부 실정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감 중에도 뉴스를 접하긴 하지만 나를 비롯한 몇몇이 보수 내부의 돌아가는 상황을 수시로 전했다. 이를 들은 박 전 대통령은 이대로 가다간 보수가 질 것이라고 걱정했고, 결국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친박 원로를 비롯한 측근들과 마지막까지 편지 내용을 가다듬은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엔 과거 ‘문고리 3인방’으로 통했던 참모 한 명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모은다. 앞서의 친박 원로는 “편지가 그리 길진 않지만 정말 오랫동안 고쳐 쓴 것이다. 문구 하나하나 주변 측근들과 상의했다. 특히 마지막엔 오래 같이 일했던 그 참모가 감수를 봤다”면서 “편지 공개 시기는 알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박 전 대통령 측은 편지를 두고 ‘애국심’을 강조했다. 한 친박 전직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이 이제 와서 무슨 욕심이 있다고 편지를 공개했겠느냐. 자신의 고향인 대구·경북 지역 주민들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정부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심정에서 편지를 썼을 것”이라면서 “이 편지를 갖고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쪽이야말로 탄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가에선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기류가 강하다. 편지 내용과 공개 시점 등을 따져봤을 때 또 다른 노림수가 담겨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한 친박계 의원은 편지 마지막 부분인 ‘저도 하나가 된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보수가 미래통합당으로 간판을 바꿔 단 이후 총선 판세는 유리해졌다. 1당 기대감도 나온다”면서 “이런 상황이 편지 작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가톨릭대학교서울성모병원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고성준 기자
박 전 대통령으로선 미래통합당이 총선에서 승리해 원내 주도권을 확보할 경우 향후 사면 등에 있어서 유리한 입지를 다질 수 있다. 그 전제는 박 전 대통령 스스로가 미래통합당에 대한 최소한의 영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의 친박계 의원도 “미래통합당이 선거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면 아마 편지를 공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치밀한 계산 하에 이뤄진 행동”이라면서 “박 전 대통령이 선거 한두 번 해보느냐”고 되물었다. 이는 정가 일각에서 “박 전 대통령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얹으려 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박 전 대통령이 경고성 시그널을 보낸 것이란 해석도 들린다.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마케팅’을 앞세우고 있는 몇몇 당과 후보들을 향해 편지를 띄웠다는 것이다. ‘서로 분열하지 말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실제 친박계 전·현직 의원들은 이번 공천 심사 등에서 경쟁적으로 박 전 대통령 이름을 활용했다. 탄핵 반대 경력을 앞세우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상당한 불쾌감을 내비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통합당은 박 전 대통령 편지로 당장의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만 전체 선거에선 악재가 될 것이란 반응이 많다. 통합당은 친박계 인사들에 대한 공천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의 ‘칼’이 유독 친박계 앞에선 무뎠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공천에서 떨어지면 친박 신당 또는 무소속으로 나올 것”이라며 버텼다. 특히 박 전 대통령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TK(대구·경북)지역에선 더욱 그랬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거대 야당 중심의 선거를 호소하면서 통합당 인적쇄신의 물꼬가 트였다는 평이다. 공천에서 탈락하더라도 친박 신당 등으로의 이탈 가능성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공천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친박계로선 이제 당을 떠날 명분이 사라진 셈이다. 박 전 대통령이 분열하지 말라고 했는데, 쉽게 움직이겠느냐”면서 “박 전 대통령이 공관위의 어려운 문제 하나를 풀어줬다”고 말했다.
선거 전체 판세를 봤을 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박근혜 옥중 편지에 대한 질문에 통합당 의원들 상당수가 부정적인 답을 내놨다. 새보수당 출신의 통합당 의원은 “겨우겨우 탄핵의 강을 건너 왔는데, 다시 시계바늘을 되돌리려 하는 것이냐”면서 “강성 지지자들에겐 먹힐지 몰라도, 누구에게 투표할지 고민하는 부동층에겐 역효과가 날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민주당의 ‘X맨’ 역할을 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통합당 의원도 쓴소리를 보탰다. 그는 “지금 누구 때문에 보수가 갈기갈기 와해돼 어려움을 겪었느냐. 박 전 대통령 본인은 억울할 수 있겠지만 진짜 나라와 당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공개적인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면서 “박 전 대통령이 나서지 않더라도 지금 중도·보수가 통합당으로 합쳐서 잘 준비하고 있었는데, 왜 갑작스레 편지를 썼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총선 이후를 대비해 지분이라도 얻겠다는 것인가. 정치적으로 오판을 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박 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박 전 대통령이 국정농단을 반성하기는커녕 다시 국민을 분열시키는 정치선동에 나선 건 안타까운 일”이라며 “국민에게 탄핵당한 대통령이 옥중 정치로 선거에 개입하려는 행태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현명한 판단을 바탕으로 준엄하게 심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의당은 박 전 대통령을 선거개입 혐의로 고발하기도 했다.
민주당 일각에선 호재라는 분위기도 읽힌다. 앞서 통합당 의원이 우려했던 것처럼 중도 성향 표심이 민주당으로 쏠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민주당 한 의원은 “통합당에 박근혜 그림자가 덧씌워지면 질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 옥중 편지 후 통합당에 등을 돌린 중도층이 많을 것으로 점쳐진다”면서 “동시에 ‘탄핵’ 때 힘을 모았다가 조국 사태 등으로 갈라진 진보층의 재결집도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