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신한은행 본점. 사진=박정훈 기자
#키코 배상안 두고 은행권과 금융당국 힘겨루기?
“은행들이 표면적으로 배임죄 우려를 핑계 삼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배상을 한 우리은행은 배임을 한 게 되는가. 금융당국은 이미 법적 리스크를 충분히 검토한 뒤, 은행이 요청하는 자료를 제공하며 키코 배상이 배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해왔다. 다만 권고안은 강제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은행들의 결정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신한은행과 하나은행, DGB대구은행 등이 키코 손해액 배상 수락 기한을 또 다시 연장을 요청한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강제성이 없는 배상 권고안을 내놓는 과정에서 은행권과의 협의에 심혈을 기울였던 만큼, 이를 거부하고 있는 은행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키코 사건은 재조사부터 배상 관련 권고안 결정까지 난항을 거듭했다. 금감원은 2013년 대법원 판결 이후 키코 사건에 대해 1년여 동안의 재조사를 벌인 끝에 피해기업 구제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지난해 6월부터 배상안 도출을 위한 논의 와중에 DLF(파생결합펀드) 사태와 라임 사태 등이 연이어 터졌다. 결국 배상안 결정 시기가 뒤로 밀리면서 지난해 12월에야 배상 권고가 결정됐다.
금감원 분조위는 지난해 12월 12일 키코 피해기업 4곳에 대한 분쟁조정을 실시한 결과 신한‧우리‧산업‧하나‧대구‧씨티, 6개 은행에 손실의 15~41%를 배상하라고 권고했다. 은행들이 키코 상품을 불완전판매 했다고 판단한 것. 배상액 규모는 신한은행이 150억 원으로 가장 규모가 컸고, 우리은행 42억 원, 산업은행 28억 원, KEB하나은행 18억 원, 대구은행 11억 원, 씨티은행 6억 원 등 총 256억 원이다.
그러나 금감원의 권고안을 두고 은행권이 엇박자를 내기 시작했다. 배상을 해야 하는 6개 은행 가운데 우리은행을 제외한 나머지 5개 은행이 잇따라 배상안을 거부하거나 연기를 요청한 것. 권고안 자체가 강제성이 없는 만큼 연기를 요청한 은행들도 불수용 입장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그간 윤석헌 금감원장이 직접 나서 추진했던 키코 배상이 난항에 부딪히자 일각에서는 금감원이 ‘종이호랑이’ 신세가 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신한은행 압박카드 쥔 금감원
은행 가운데 유일하게 키코 배상을 완료한 곳은 우리은행이다. 일성하이스코와 재영솔루택 등 두 곳의 피해기업에 대해 손해배상금 지급이 권고된 우리은행은 지난 2월 모든 배상을 완료했다. 발빠른 배상에 나선 이유에 대해 우리은행 관계자는 “고객 신뢰 회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배상 권고를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그러나 은행권에서는 우리은행이 금감원과 더 이상 대립각을 세우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우리은행은 그간 DLF 사태와 휴면계좌 비밀번호 무단도용 사건으로 금융당국의 제재를 받은 데다, 최근에는 라임 펀드 불완전 판매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고 있다.
우리은행이 자발적으로 배상에 나서면서 금융당국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게 된 곳은 신한은행이다. 키코 사건에서 배상금 규모가 가장 큰 신한은행은 라임 사태와 관련해서도 시중은행 가운데 우리은행(3577억 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판매금액(2769억 원)을 기록했다. 금감원에 신청이 접수된 라임 사태 관련 분쟁조정 신청 건 또한 7개 은행 총 216건 가운데 우리은행(150건) 다음으로 높은 비중(34건)을 차지한다. 게다가 신한금투의 경우 라임과 부실 은폐 및 사기 혐의 ‘공범’으로 지목된 상황이다. 은행권에서는 우리은행 사례처럼 금융당국이 여러 방향으로 신한은행을 압박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관련,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은행들 사이에서는 우리은행 비밀번호 변경 건이 보도된 내용과 달리 실상 실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금융당국이 DLF 등 굵직한 이슈가 많았던 상황에서 우리은행을 필두로 은행권에 기선제압을 했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비밀번호 변경 건이 알려지며 금감원이 우리은행을 압박했던 시기와 우리은행이 손 회장의 연임을 위해 이사회를 열기로 한 시기가 겹쳤다”고 귀띔했다.
#키코 공대위 “신한은행 피해기업에 ‘지급명령’ 신청 꼼수”
신한은행을 향한 비난여론도 무시하기 어렵다. 외환파생상품 키코 피해기업들로 이뤄진 키코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3월 9일 신한은행 본점을 방문해 신한은행 측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방문은 항의 성격이었다. 신한은행은 이에 앞서 지난 6일 금감원에 배상 수락 기한 연장을 요청했다.
또 키코 공대위는 신한은행이 키코 피해기업의 연대보증 채무에 대해 지급명령을 신청한 것에 대해서도 “키코 피해 배상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신한은행이 배상 이후 배상금을 다시 찾아올 조치는 제일 빠르게 취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키코 공대위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금감원 분조위에서 신한은행으로 하여금 원글로벌에 지급하라고 권고했던 같은 금액만큼 지급명령을 신청했다. 신한은행이 원글로벌에 배상금을 지급하면, 그 배상금이 그대로 다시 신한은행에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해놓은 것.
금융당국이나 키코 공대위의 압박 속에서도 신한은행이 키코 배상을 망설이는 까닭은 배상금 부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신한은행은 현재 권고된 배상금보다는 뒷단에 147개 피해기업이 남아있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금감원은 은행에 분쟁조정 대상 기업 4곳 이외에도 나머지 147개 피해기업에 대해 분조위 분쟁조정 결과를 토대로 자율조정(합의 권고)을 의뢰한 바 있다.
반면 신한은행은 세 번째 연장신청 이후 아직 결정된 내용이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세 번째 연장신청 이후 별다른 내용이 나온 것이 없다”며 “배상한다는 것 자체가 배임 이슈 등 검토할 내용이 많아 내부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것 일 뿐, 나머지 147개 기업에 대한 부담 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