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피해 입증을 위해 제출된 증거가 범죄 사실 입증을 위한 증거로 활용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하필이면 이런 일이 연예계에서, 그것도 하정우처럼 정상급 스타를 두고 벌어졌다. 연예계에선 ‘우린 협박 받으면 그냥 돈 주고 무마하라는 얘기냐’는 볼멘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영화 ‘백두산’ 제작보고회 당시의 하정우. 사진=박정훈 기자
#정답은 신고이지만…
스타급 연예인이 누군가에게 약점을 잡혀 협박을 당한다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교과서적인 정답은 ‘경찰이나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것’이다. 우선 협박범이 요구하는 돈을 줘 합의를 할지라도 정말로 그 약점을 외부에 유출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없다. 협박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우려도 있다. 약점을 잡혀 돈을 준다면 계속 비슷한 요구가 이어질 수 있다. 게다가 피해가 연예계 전반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신고해야 한다.
다만 정답은 정답일 뿐이다. 연예계에선 ‘합의가 필수’라는 답변이 더 많았다. 행여 그 약점이 대중에게 공개될 경우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중견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최근 불거진 휴대폰 해킹 사건에서 정답대로 행동한 것은 주진모이며 그의 용기와 결단은 당연히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협박범들이 유출한 자료들로 인해 본인은 물론 동료 연예인까지 난처해졌다”라며 “정말 정답은 ‘평소에 약점 잡힐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못해 누군가에게 약점을 잡힌다면 안타깝게도 협박범에게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게 연예인의 숙명”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하정우 압수수색이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 하정우의 휴대폰 자료는 이번 연예인 휴대폰 해킹 협박 사건의 ‘피해자’ 입장에서 ‘범인 검거’를 위해 제출된 것이었다. 그가 주진모처럼 앞장 서 ‘정답’에 가까운 행보를 걸은 것은 아니지만 경찰 수사가 본격화 된 뒤 수사에 협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휴대폰에도 프로포폴 불법 투약 관련 증거가 없다면 하정우는 손쉽게 관련 의혹을 벗어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매우 난감할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연예계에선 다시 한 번 ‘정답은 정답일 뿐’이라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
#유출만큼이나 무서운 루머
감추고 싶은 비밀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만큼이나 무서운 건 관련 루머다. 루머가 무서운 건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두렵기 때문이다. 루머를 대하는 대중은 사실 여부보다 흥미만을 쫓는다. 하정우의 경우 협박범들에게 20억 원이 넘는 거액을 건넸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해 하정우 측은 “금액은 물론, 모든 내용이 사실무근”이라며 “합의조차 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연예인들의 휴대폰이 해킹당한 사건을 최초 보도한 디스패치에 따르면 배우 A·B 씨, 아이돌 C 씨, 감독 D 씨, 셰프 E 씨, 그리고 주진모 등 확인된 피해 사례만 해도 10건이 넘는다. 여기 언급된 배우 가운데 한 명이 하정우, 셰프는 최현석이라는 점 등이 하나둘 드러났다. 피해사례 가운데 2018년 8월 사건도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관련 범죄가 2년 가까이 지속됐으며 피해 연예인도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수사기관 관계자들은 협박 사건의 정답은 신고라고 강조한다. 사진=이종현 기자
관련 루머도 넘쳐난다. 구체적으로 어느 연예인이 어떤 내용으로 협박받고 있다는 내용들이다. 이 과정에서 다른 연예인들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다. 사실 여부에 책임을 지지 않는 루머의 내용은 상당히 자극적이다. 예를 들어 협박당한 배우 A가 협박범에게 수십억 원을 합의금으로 줬는데 실제로 돈을 입금한 것은 A나 A의 소속사가 아닌 동료 여배우 B의 소속사라는 루머가 있다. A의 휴대폰에 두 사람의 적나라한 사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B 측이 유출되는 것을 더 두려워해 합의금까지 대신 냈다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루머란 늘 부질없고 부정확하다. 스마트폰 해킹 관련 루머가 넘쳐났지만 하정우의 프로포폴 불법 투약 의혹 관련 루머는 전혀 없었다. 반면 수사기관이 주목한 것은 하정우의 프로로폴 불법 투약 관련 의혹이었다. 루머로 인해 대중이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검찰이 전혀 다른 곳을 쑥 치고 들어온 형국이다.
#사생활 유출은 걱정 없지만…
수사기관 관계자들은 그래도 ‘정답은 신고’라고 강조한다. 하정우 압수수색은 매우 이례적인 상황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수사기관에서 휴대폰에 담긴 사생활 등 약점이 될 수 있는 스타의 비밀을 확보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수사를 위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증거가 수사기관 외부에 유출될 우려는 거의 없다. 요즘에는 증거에 대한 보안이 워낙 철저해져 담당 수사팀만 접근할 수 있어 검찰이나 경찰 내부 공유 가능성도 거의 없다. 담당 수사팀 역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제한적으로 증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수사기관에서 사생활이 유출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도 된다”라며 “하정우 씨 경우처럼 사생활이 아닌 불법 행위 관련 사안은 상황이 달라질 수 있지만 이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다. 이번에 검찰이 경찰과 자료 및 증거를 공유하는 방식이 아닌 압수수색의 형식으로 일이 처리된 것도 같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조재진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