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고는 사람들 모여 있는 풍경과 소품이 여러모로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의 정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광고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저 정취만이 아니다. 광고는 순정만화 클럽이라는 모임을 소재로 삼으면서 순정만화란 어떤 것이다-를 보여주려 했는데, 역설적으로 ‘순정만화’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을 너무나 명확하게 반영했다. ‘누구라도 눈물 쏟게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고, 그 독자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모두 여성이며, 남자가 이런 걸 보는 건 보통은 놀림감’이라는 고정관념 말이다.
광고를 보며 실컷 웃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고 만다. 순정만화에 얽힌 고정관념을 역이용한 건 좋은데, 결과적으로는 결국 고정관념에서 못 벗어난 건 아닌가. 굳이 이미 사업을 접고 철수한 업체의 옛 광고에 트집을 잡으려는 생각은 없다. 다만 저 고정관념만큼은 광고가 나온 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을 거듭하고 있다.
김혜린 작가의 데뷔작 ‘북해의 별’은 가상의 북유럽 보드니아에서 펼쳐지는 시민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대하서사극이다. 1983년부터 연재되어 독재 시기 한국의 학생운동가들에게 필독서처럼 여겨졌다.
남성들이 특히나 많이 오해하는 부분이지만, 순정만화는 오로지 애절한 감정을 뽑아내는 로맨스를 무기로 삼는 장르가 아니다. 만화만이 아니라 특정 대상을 가리키는 용어 가운데 명칭 때문에 오해를 사는 사례를 꼽자면 ‘순정만화’는 분명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터다. 오해를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이라면 국어사전에서 ‘순수한 감정이나 애정’으로 해설하는 ‘순정’이란 말을 앞에 붙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주 창작자층과 주 독자층이 여성들로 형성돼 있다는 점을 빌미로 이러한 사전적 의미를 곧이곧대로 장르적 특징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명칭의 사전적 의미와 명칭이 가리키는 바가 명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게 된 건 1980년대부터니까 실제로는 벌써 어언 30년은 훌쩍 넘어간 이야기다.
순정만화라는 명칭 자체는 국산(?)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소녀만화(쇼우죠망가)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한국에서 순정만화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건 전쟁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순정만화라는 이름을 장르명으로 세우다시피 한 인물은 ‘행복의 별’의 엄희자 작가다. 1960년대 데뷔한 엄희자 작가는 순정만화라 불리는 만화의 표현 양식과 구성 요소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하지만 엄희자 류 순정만화가 붐을 일으켰던 것도 잠시, 검열의 칼날과 만화 유통을 독점으로 틀어쥔 ‘합동출판’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긴 공백기가 찾아왔고 이 빈 공간을 ‘캔디 캔디’ 등 일본의 소녀만화의 해적판들이 채운다. ‘캔디 캔디’의 유행을 통해 여성 독자층에 눈을 돌린 출판사들을 통해 1980년을 전후한 시점에 황미나, 차성진, 김동화, 이진주 작가 등이 순정만화를 그렸고, 그 뒤를 따라 해적판 일본 소녀만화의 형식미와 표현 양식을 받아들였던 이들이 점차 자기 만화를 들고 등장하기 시작한다.
임주연 작가의 대표작 ‘씨엘’은 장대한 세계관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전개로 독자들을 쥐락펴락하는 마법 판타지로 2000년대 한국 순정만화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이 시기 순정만화는 이미 김혜린의 ‘북해의 별’이나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황미나의 ‘이오니아의 푸른 별’과 같이 여성이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난 대하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었으며, 강경옥의 ‘별빛 속에’나 김진의 ‘푸른 포에닉스’, 김혜린의 ‘아라크노아’ 같은 SF도 등장했다. 게다가 ‘아홉 번째 신화’ 수록작인 김혜린의 ‘우리들의 성모님’이나 ‘사과 한 개’ 같은 단편에서는 시대의 질곡을 담아낸 리얼리즘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순정만화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인물 군상들의 욕망을 대리함은 물론 인간의 생명과 삶을 담아내는 우리의 언어적 틀로서 일찍이 자리를 잡았음을 나타낸다. 이는 모험과 우정, 대결 등의 주제를 주로 다루었던 한국의 남성용 만화들과는 다분히 다른 점이었다.
#현재의 순정만화를 오롯이 보기 위해서
출판만화 시장이 휘청거리고 웹으로 만화의 주축이 넘어가기 전까지 순정만화는 ‘윙크’ ‘나나’ ‘이슈’ ‘파티’ ‘화이트’ ‘마인’ ‘나인’ 등 다양한 연령대와 성격에 따른 잡지들을 통해 독자들을 만났다. 앞서 1980년대에 등장했던 이들만이 아니다. 한혜연, 김은희, 유시진, 심혜진, 나예리, 박희정, 최인선, 박은아, 임주연, 윤지운, 권교정, 박소희, 김연주, 한승희, 천계영, 서문다미 등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해 온 만화가들의 작품은 순정이라는 낱말의 사전적 의미에 가둘 수 없는 다양하고 폭넓은 소재로 독자들의 선택을 받아 왔다.
‘화장 지워주는 남자’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감내해온 사회적 압박들을 화장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순정만화는 그 많은 작가와 작품들을 만들어냈으면서도 시작점 이후의 역사 상당부분을 저평가받고 있으며, 그나마도 1990년대 후반 이후의 작가들은 웹툰에 묻혀 잘 불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한 명 한 명 호명해서라도 되새겨야 한다. 그래야만 만화사 안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 안에서 지금 이 순간 꾸준히 자기 역할을 해내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순정만화들에 시선을 오롯이 줄 수 있다.
최근엔 조심스레 로맨스보다 여성의 목소리와 이야기에 무게 중심을 맞춘 작품에 ‘여성만화’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논의는 필요하겠으나, ‘순정만화’로 분류 내지는 간주되는 작품들을 배제하는 사례들이 보이는 건 ‘순정만화’에 관한 편견을 오히려 강화하는 꼴이 아닌가, 조금은 우려스럽다. 여전히 ‘순정’을 앞에 둔 용어의 한계는 명확하고 그로 말미암은 오해와 편견은 크지만, 장르로서의 ‘순정만화’가 그 안에 끌어들여 온 맥락이 작지 않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만화칼럼니스트 iam@seochanhw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