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31일 대우조선해양 MOU(양해각서) 체결 관련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 사진=이종현 기자
#정책금융기관이 굳이 라임을 판매한 이유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정책금융기관이 굳이 라임을 판매한 이유를 모르겠다. 상품을 판매하기 전 타행들에게 문의하거나 확인했을 텐데, 다른 은행들이 문제를 파악하고 판매를 중단한 시점에 팔았다는 점도 의문이다. 다만 최근 언론에서 불거진 의혹처럼 외부의 압력 때문에 판매했다고 보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다. 정말 모르고 팔았던 것 같다. 은행들도 산은이 라임을 판매한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은행권 관계자들 또한 산은이 라임 사태에 이름을 올린 데 대해 “의아하다”고 입을 모았다. 수수료 수익 등 비이자 수익부문 확대가 절실한 타 시중은행과 달리 산은이 굳이 무리해서 라임 펀드 같은 고위험 상품을 판매할 이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산은은 정부가 지분 100%를 보유한 국책은행으로, 주된 역할은 정책금융이다. 이동걸 산은 회장 또한 취임 때부터 산은의 본래 업무는 벤처 및 중소기업 지원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라임 펀드 판매 건의 경우 주된 업무가 아닌 금융투자상품 위탁운용 업무 부문에서 문제가 발생한 경우다. 산은의 라임펀드 판매 잔액은 은행 가운데 가장 적은 61억 원 규모이지만 민간 타 은행보다 더 높은 공공성이 요구되는 데다, 본연의 업무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난 여론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은행연합회 공시를 통해 산은의 경영실적을 확인해보면, 2018년 기준 당기순이익 2조 5098억 원, 부문별 이익합계는 2조 1868억 원이다. 이익합계 가운데 △대출채권 및 유가증권 등 이자로 구성된 이자부문 소계는 1조 3829억 원(63.2%) △금융상품 및 용역 수수료 등으로 구성된 수수료부문 소계는 3086억 원(14.1%) △신탁업무 운용수익인 신탁부문 소계 287억 원(1.7%) △파생금융 상품 관련, 외환거래 이익 등으로 구성된 기타영업부문 소계는 4666억 원 (21.3%) 등이다. 산은은 전체의 14.1%밖에 되지 않는 수수료 수익을 위해 파생상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라임 사태에 이름을 올리게 된 셈이다.
라임 펀드 판매 이유와 관련해 산은 관계자는 “국책은행이라 해서 소매판매 기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운용자금은 대부분 채권으로 조달하지만, 시장 상황에 따라 안정적인 자금원이 필요하다보니 예수금이라든가 PB(프라이빗뱅킹) 같은 부분을 10% 정도 가져가는 부분이 있다”며 “PB 고객들을 대상으로만 상품을 소개해드렸는데, 문제가 발생해 안타깝다”고 설명했다.
#“정말 몰랐다”는 산은, PB판매 관리 부실 책임론
산은의 소매형 투자상품 관리가 부실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우선 판매 시점부터 문제로 지적된다. 산은은 지난해 7월 3일부터 8일까지 일주일가량 라임 펀드를 판매했다. 이는 우리은행이 지난해 4월 판매를 중단한 지 3개월이 지난 뒤다. 신한금융투자의 경우 그에 앞서 지난해 1월 라임 펀드 관련 이상 징후를 파악하고 사실 확인을 위해 담당자가 직접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산은이 라임 펀드를 판매한 시기 라임을 둘러싼 금융당국과 검찰의 움직임 또한 수면위로 떠올랐다. 금감원은 지난해 6월 라임에 대한 이상 징후를 포착하고 검찰에 이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다른 시중은행들이 문제를 파악하며 판매가 어려워진 라임이 산은에 먼저 접근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부분 시중은행이 비슷한 시기 문제를 파악하고 상품 판매를 중단했다. 루트가 막힌 라임이 산은을 통해 상품을 판매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소매형 투자상품과 달리 산은은 수백억 원대의 수익을 거두고 있는 파생상품 거래에는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선동 자유한국당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산은은 파생상품 거래를 위해 금융공학실 전문인력 45명이 100% 자체헤지를 통해 위험관리를 하며 연간 783억 원의 수익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생상품 거래액은 2018년 기준 739조 7193억 원이다.
산은 관계자는 “라임 펀드를 판매하기 전 (라임 펀드와 관련 타행에) 평판조회는 했지만, 사모펀드는 공모펀드와 달리 오픈되는 정보가 제한돼 있고 운용사에서도 의무사항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피해를 본 투자자들에게 최대한 도움을 드릴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자체적인 파생상품 거래와 소매형 투자상품 판매는 시스템이 전혀 다르다”며 “소매형 투자상품의 경우 산은이 직접 구성해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운용사 상품을 판매하는 창구일 뿐”이라고 밝혔다.
키코 공대위를 통해 입수한 키코 관련 일성하이스코 피해 내역.
#국책은행 맏형인데…키코 배상 거부 속내는?
산은의 대형 금융사고는 라임 사태가 처음이 아니다. 산은은 최근 배상이 진행 중인 키코(KIKO) 상품의 판매사 중 하나이기도 하다. 키코란 기업과 은행이 환율 상하단을 정해놓고 그 범위 내에서 지정환율로 외화를 거래하는 환헤지 통화옵션 상품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은행들과 키코 계약을 맺은 중소기업들이 원화약세로 큰 손실을 봤다. 2013년 대법원 판결로 일단락됐던 키코 사태는 2018년 금감원이 재조사를 나서며 재조명됐다.
금감원은 장고 끝에 지난해 12월 분쟁조정안을 내놨지만, 산은은 지난 3월 5일 조정안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우리은행이 조정안을 수용해 배상을 완료하고, 다른 은행들이 수락기한을 연장하며 고심하는 상황에서 산은이 거부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6개 은행 가운데 거부 입장을 밝힌 곳은 산은과 외국계인 씨티은행 두 곳뿐이다.
참여연대와 키코 피해기업으로 구성된 키코공대위는 분쟁조정안을 거부한 은행들을 강력하게 규탄하며 피해 기업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 키코 공대위에 따르면 산은과 키코 상품을 계약한 것으로 파악되는 기업은 일성하이스코와 칼링크, 효성전기 등이다.
일성하이스코는 이번 분쟁 조정 대상 기업 4곳에 포함돼 28억 원의 배상금을 인정받았고, 칼링크와 효성전기의 피해금액은 각각 42억 원과 122억 원 규모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일성하이스코는 2017년 8월부터 2018년 1월까지 산은과 맺은 세 차례 키코 계약을 통해 121억 원 규모의 피해를 봤다. 분조위를 통해서는 23%가량의 배상 인정만이 이뤄진 셈이다.
더욱이 산은은 조정안 수용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이사회를 소집할 계획도 마련하지 않고 배상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지며 비난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키코 공대위는 “국책은행인 산은이 적극적인 배상에 나서기는커녕 본분을 망각한 채 이사회 논의도 없이 단박에 조정안을 거부했다”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 산은 측은 “키코 배상 불수용과 관련해서는 은행 내규 의사 결정에 따라 입장이 정해진 것이라 말씀드릴 내용이 없다”고 답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