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은 최근 동해안 ‘합동 타격훈련장’을 방문했다. 북한 소식통이 전달한 사진.
2020년 1월 7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평안남도 순천 소재 순천인비료공장 건설장 현지지도에 나섰다. 순천은 평양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다. 이날 이후로 김 위원장의 평양 및 그 인근 지역 공개 활동은 뜸해졌다. 공교롭게도 코로나19 공포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1월 중순 북한 당국은 전격적인 국경 봉쇄 조치에 돌입했고, 김 위원장이 평양에서 공개 활동을 펼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 생일을 맞아 2월 16일 금수산 태양궁전을 참배한 것을 빼면, 사실상 평양에서의 공식 활동은 없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2월 중순 일요신문 취재에 응한 한 북한 전문가는 “면역력이 약한 김정은이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김정은의 공개 활동은 당분간 평양 밖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점쳤다. 이 예측은 적중했다.
김 위원장은 원산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 지역에서 ‘합동 타격훈련장 방문’ 등의 공개 활동을 이어갔다. 김 위원장 활동 범위는 주로 평양 밖에서 포착됐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 북한 소식통은 “김정은이 코로나19를 의식해 평양 내 공개 활동을 자제하는 중”이라면서 “코로나19 도피 행보”라고 분석했다.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실제로 김 위원장이 코로나19에 대해 심각한 경계심을 느끼고 있다는 정황 증거도 있다”며 사진 몇 장을 일요신문에 건넸다. 사진은 김 위원장이 경호원들과 함께 현장을 시찰하는 모습이었다.
북한 소식통이 전달한 사진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경호원들은 매우 이례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김 위원장 경호원들이 공통적으로 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김 위원장 본인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 이 사진엔 ‘작가최성호(作家崔成浩)’라는 저작권자 워터마크가 한자로 표시돼 있었다. 북한 소식통은 “김정은을 호위하는 경호 인력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수뇌부뿐 아니라 병원과 군을 비롯한 북한 사회에서도 코로나19 공포감은 높아지는 추세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 북한 전문가는 “최근 북한 군과 병원에서도 코로나19로 의심되는 사망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추세”라고 귀띔했다.
북한 전문매체 ‘데일리NK’도 이 발언과 맥을 같이 하는 현지 분위기를 보도했다. 3월 6일 데일리NK는 북한 현지 군 소식통 발언을 인용해 “3월 3일 (북한) 군의국은 ‘1, 2월 사망자 180명, 격리자 3700명’이란 결과를 최고사령부에 보고했다”고 보도했다. 데일리NK에 따르면 해당 보고 문건에서 언급된 사망자 중엔 중국 접경지대인 평안북도, 자강도, 양강도, 함경북도 주둔 국방경비대 소속 병력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3월 16일엔 “도 인민병원과, 시 인민병원, 진료소에 감기나 폐렴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가 늘고 있다”면서 “2월 한 달 평성시 인민병원에서 사망 판정을 받은 환자가 56명이고, 이 가운데 고열과 폐렴 증세를 보인 사망자는 60%가 넘는다”는 평안남도 현지 관계자 발언을 인용한 데일리NK 보도가 있었다.
북한 관영매체와 중국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코로나19 의심 환자’로 분류해 격리하고 있는 북한 주민은 7000명 규모로 추산된다. 2월 24일 조선중앙방송은 중국 접경지역인 평안북도 소재 ‘의학적 감시 대상자’를 3000여 명으로 추산했다. 노동신문은 3월 1일 보도에서 평안남도에 2420여 명, 강원도에 1500여 명의 ‘의학적 감시 대상자’가 있다고 했다. 여기서 ‘의학적 감시 대상자’는 북한이 자가 격리자를 비롯한 코로나19 발병 위험군을 일컫는 단어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북한 내 코로나 확산 위험성이 상당히 높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강 대표는 “북한의 병원 시설이 상당히 열악하다. 북한 병원 음압병실엔 전기도 안들어온다”면서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된다면, 북한은 상당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없다’는 북한 당국 발표와 관련해 강 대표는 “확진자가 한 명도 없는데 어떻게 온 나라가 그렇게 방역을 하느냐”며 “중국 국경을 거의 석 달째 봉쇄하고 있는데, 그 정도면 무엇인가 있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홍콩 언론 ‘봉황망’은 “러시아가 북한에 코로나19 검사시약 1500개를 전달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3월 4일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 ‘코로나19 사태 관련 직·간접적 SOS 요청’ 내용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했다. 강철환 대표는 “최근엔 중국 정부 쪽에서 북한에 코로나19 관련 지원을 하려는 기류가 포착되고 있기도 하다”고 귀띔했다.
3월 17일 평양종합병원 착공식에 참석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연합뉴스
한편, 김정은 위원장은 3월 17일 ‘평양종합병원 착공식’에 참석했다. 지난 두 달여 동안 민생 현장을 김재룡 내각총리에게 맡겼던 김 위원장은 오랜만에 평양권 지역에서 개최된 공식 행사에 얼굴을 비쳤다. 1월 7일 순천인비료공장 건설현장 시찰 이후 72일 만(보도일 기준)이다.
김 위원장은 이날 착공식 연설을 통해 “전원회의(2019년 말 개최)에서 자기 나라 수도에마저 온전하게 꾸려진 현대적 의료 보건시설이 없는 것을 가슴 아프게 비판했다”면서 “올해 계획됐던 많은 건설사업을 뒤로 미루고 (종합병원을) 착공하게 됐다”고 했다.
한창권 탈북민단체연합회장은 김 위원장의 ‘평양종합병원 착공식’ 참여와 관련해 “국제적으로 코로나19 확산세가 증가하면서, 김정은 역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열악했던 의료 시설에 대한 정비에 관심을 가지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회장은 “아직 평양종합병원이 어떤 병원이 될지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이 제시되지 않았다”면서 “이번 평양종합병원 착공이 북한 당국의 정치적 쇼일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 회장은 김정은의 ‘코로나 도피성 행보’와 관련해서 다른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한 회장은 “김정은은 신변에 위협이 가해지는 상황에 대비해 9중, 10중으로 경호 라인을 세팅해놓는다”면서 “방역에도 예외가 없다”고 했다. 한 회장은 “오히려 평양에 있는 것이 지방에 가는 것보다 방역적으로는 안전할 것”이라면서 “김정은이 코로나19로 인해 동해안 시찰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는 의견들은 여러 추측 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