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충격을 준 어린 선배 이름은 신민준이었다. 이 패배는 도장에서 하루 12시간씩 공부하는 동력이 되었다. 도장에서 이동훈은 알아주는 악바리 공붓벌레였다. 치열한 노력 끝에 이동훈은 제9회 어린이 국수전(2009년 대한생명배)을 먼저 우승했다. 입단도 신민준보다 약 1년 더 빨랐다.
어린이 국수전 우승자들. 왼쪽부터 2009년 이동훈, 2010년 신진서, 2011년 신민준. 사진=사이버오로
신진서. 신민준은 “진서의 얼굴은 2010년 열린 제10회 어린이국수전 대회장에서 처음 봤다. 불가사리처럼 각종 아마 대회를 휩쓴 무서운 소년이라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결승에서 누나(오유진)와 대국하는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만 했다”라고 말한다. 여긴 ‘부산 신동’이었다. 첫 대국은 신진서가 연구생리그에 들어왔을 때 이뤄졌다. 여기선 신민준이 패했다. 경악했다. “당시 진서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런데 수읽기의 깊이와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라고 기억했다.
신민준. 어린이 국수전에서 이동훈, 신진서에 이어 11번째 우승자에서 되었다. 두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세계바둑챔피언(특히 응씨배)이 될 거예요”라고 당차게 말했다. 신민준은 행운아다. 라이벌 복이 남달랐다. 도장 시절엔 모범생 이동훈이 끊임없이 자극을 줬고, 입단 후에는 최고를 향해 달려가는 신진서가 있었다. 서로 장점을 쫓아가며 성장을 거듭했다. 현재(3월 기준) 한국랭킹은 신진서가 1위, 신민준이 3위, 이동훈이 5위다. 이 랭킹 사이에 박정환(2위)과 변상일(4위)이 있다. 어린이 국수를 제패한 삼총사는 이미 세계 바둑계를 받치는 굵직한 기둥이 됐다.
신민준은 2012년 여름에 열린 제1회 영재입단대회에서 신진서와 함께 입단했다. 언론은 이 둘을 ‘양신’이란 이름으로 묶어버렸다. 입단 후 신진서와 공식대국에서 23번 만났다. 상대전적은 5승 18패, 세계대회 성적도 신진서에게 살짝 가렸다. 신민준은 앞선 토끼를 바라보는 거북의 마음으로 묵묵히 달렸다. 지난 7년 동안 신진서와 비교당하며 자칫 주눅이 들 수도 있었다. 모두 걱정했지만, 느긋한 품성이 받쳐주는 꾸준함이 성장 동력이었다.
지난 3월 8일,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 사건이 벌어졌다. 바둑리그 챔피언결정전 최종라운드, 팀 우승이 걸린 중요한 길목에서 만났다. 역대 ‘양신 대결’ 중 가장 주목 받은 판이다. 신진서가 28연승을 질주하며 대국마다 자체 기록을 경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신민준은 ‘무적’ 신진서의 연승을 마감하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올해 KB리그 MVP는 떼놓은 당상이다.
2020년 3월 맥심커피배 4강에 오른 신민준. 결승 길목에서 만나는 상대는 또 신진서다. 사진=사이버오로
“예전엔 진서를 만나면 약간 위축된 마음이 들었어요. 이걸 극복한 건 농심신라면배 6연승(2017년, 한국기사 최다연승기록)한 이후입니다.”
신민준은 이번 바둑리그 챔피언결정전 전날 이미 승리를 예감했다고 말한다.
“셀트리온과 3차전 대국 전날 팀에서 제가 장고대국(1국)에 출전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이상하게 진서와 만날 것 같았어요. 그리고 이번만큼은 내가 쉽게 이길 것 같은 느낌이 왔습니다. 마음이 아주 편안했고, 아침에도 기대감으로 즐거운 흥분상태였어요.”
스승 복도 탁월했다. 신민준은 입단한 다음 해 이세돌 9단 내제자로 들어갔다. 차민수 5단이 우연한 자리에서 제안했고, 이세돌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세돌은 “민준이 정도면 가르칠 만하죠”라고 말했다. 연락을 받고 달려와 바로 큰절을 올렸다. 2013년 봄부터 여름까지 약 5개월간 숙식을 함께했다.
평일은 따로 연구실에 나갔고, 주말엔 본가로 돌아갔다. 그래도 같이 먹고 자며 바둑판을 마주한 시간 자체가 어떤 가르침보다 영향을 주었다. 지금 신민준은 많이 아쉬워한다.
“저녁에 사범님이 부르면 그날 둔 대국을 주로 복기해주셨어요. 어릴 때는 낯을 많이 가려서 적극적으로 물어보질 못했어요. 지금은 바둑 기술적인 거 말고도 예를 들어 승부 호흡이라든가 큰 승부에서 마인드 컨트롤 같은 부분을 물어보고 싶어요.”
신민준의 기억에 이세돌은 상냥한 선생님이었다. 아침에 마주칠 때 나누는 어색한 인사도 환한 웃음으로 받아주었다. 부인과 아이가 캐나다로 떠난 공간이라 사부의 누나(이세나 전 월간바둑 편집장)가 주로 밥상을 차려주었다. 함께 외식도 자주 했다. 당시 바둑리그에 첫 출전한 대국에서 안국현에게 지고 들어왔다.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세돌에게 크게 호통을 들었다. 평소 자상했던 스승에게 그렇게 혼나긴 처음이었다.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다.
스승 이세돌과의 즐거웠던 한때. 왼쪽이 신민준, 가운데는 이세돌과 딸, 오른쪽은 신민준 남동생. 사진=신민준 제공
조훈현과 이창호처럼 스승과 제자는 기풍이 엇갈렸다. 초단 시절 신민준의 느릿한 행마에 답답했던 이세돌은 어느 날 방에 들어가 일필휘지로 ‘선수필승’(先手必勝) 네 자를 직접 써서 제자에게 건네주었다. 위기십결에 나온 ‘기자쟁선’(棄子爭先)과 같은 뜻이지만, 이세돌다운 단순명료함이 깃든 조어다.
이제 9단이 된 신민준이 “지금에야 어렴풋이 그 의미를 알겠어요. 정말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제 은퇴하셔서 많이 그립기도 해요”라고 토로한다.
이 둘을 이어준 차민수는 “진서는 조훈현·이세돌의 계보를 잇는 기재다. 동훈과 민준은 이창호 과다. 앞으로 이 둘은 계속 성장하며 진서와 함께 한국바둑을 이끌어 나갈 거다”라고 확신했다.
신민준은 올해 열리는 응씨배를 정조준 중이다.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세계 대회다. 2년 후 열리는 항저우아시안게임도 겨냥하고 있다. 신진서, 이동훈 등 또래의 군대 문제 해결이 걸려있는 중요한 대회다. 그 후는 자신의 바둑을 완성하는 일이 목표다.
응씨배 결승에서 ‘양신’이 만나는 즐거운(?) 상상을 나눴다. 신민준은 “그래도 좋다. 지금까지 어떤 일, 어떤 결과가 있어도 목표만 바라보고 쉬지 않고 묵묵히 걸어왔다. 누구와 만나도 가진 실력을 최상으로 발휘하겠다. 내가 거의 이기겠지만, 만약 진서라면 질 수도 있다. 결과는 하늘에 맡기겠다”라고 말한다. ‘양신’의 숨 가쁜 선두 경쟁은 이제 시작이다.
박주성 객원기자
[승부처 돋보기] 신진서를 넘어 KB리그 챔피언결정전 3차전 1국 ●신진서 ○신민준 2020.03.08. 168수 백불계승 실전1 #실전1 ‘이날의 기세’ 흑1은 상대 세력에 좀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다. 신민준은 “흑1은 익숙했다. 이미 인공지능이 몇 번 보여준 수다. 백2로 바짝 붙이는 대응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고 말한다. 이날의 기세였다. 이 강렬한 수법이 신진서의 마음을 흔들었다. 신민준은 흑9와 흑11이 이상하다고 지적했다. 백12로 치받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까지 막고, 백16으로 젖히니 그냥 죽을 말이 아니다. 결국 패가 났고, 대가로 백은 우상귀를 통째로 접수했다. 지금 우상귀 흑(세모 표시)의 당당함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대변화다. 참고도 #참고도 ‘중앙으로 나가라’ 신민준이 직접 놓아준 진행도다. 흑은 두 점(네모 표시)를 가볍게 보고 중앙으로 나갔어야 했다. 백2로 끊어도 흑은 5로 석점머리를 두들기고 7로 백 두 점을 접수할 수 있다. 실전2 #실전2 ‘버팀은 곧 파멸’ 흑은 맹추격했다. AI 백 승률은 여전히 80% 후반대를 찍었지만, 중반 무렵 집 차이는 엄청나게 줄었다. 신민준은 여전히 여유 있는 형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백1(실전 마지막수)로 잇자 신진서가 돌을 거뒀다. 흑돌 23개(X표시)가 모두 잡혔다. 신민준은 “물론 대마가 살 방법은 있었다. 형세를 비관한 것 같다. 그냥 살아선 나쁘다고 보고 더 버틴 거다”라고 설명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