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해 4월 29일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9 대한민국 기본소득 박람회’ 개막식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재난기본소득의 불씨는 이재웅 쏘카 전 대표가 지폈다. 이 대표는 지난 1일 50만 원의 재난기본소득을 코로나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에게 지급해 달라는 내용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렸다.
이 대표는 “코로나19 감염 공포로 인한 경제위기가 심각하다. 정부가 추경으로 대책을 마련한다고 하지만 감염공포로 인한 소비 침체로 일자리와 소득의 위기가 온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대책이 아니다”라며 “경계에 있는 더 많은 사람들, 버티기 힘든 사람들의 소득을 지원해 주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재난기본소득 지급을 건의했다.
김경수 경남지사도 8일 “코로나 19로 많은 국민이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추경은 임시 대책이지 근본 대책으로는 대단히 부족하다. 내수시장을 과감하게 키울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며 “모든 국민에게 재난기본소득 100만 원을 일시적으로 지원할 것을 정부와 국회에 제안한다. 전 국민에게 동시에 지급하는 이유는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지원대상자 선별에 시간과 행정적 비용을 낭비할 겨를이 없다”고 했다.
김 지사의 제안이 나오자 ‘기본소득 전도사’로 불리는 이재명 경기지사가 바로 받았다. 이재명 지사는 “김경수 지사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며 “우리 경제구조 규모와 복지지출 비중에 비춰 재원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 경제는 코로나19로 인해 재난적 위기에 직면해 경제회복을 위한 비상대책이 필요하다. 김경수 지사의 100만 원 재난기본소득을 응원하며 전 국민 기본소득의 길을 열어가는 데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중위소득 이하 전 가구를 대상으로 재난긴급생활비 지원을 정부에 건의했다. 소득 격감을 겪고 있는 시민 대상으로 가구당 월 30만 원씩 총 60만 원을 지역사랑상품권 등으로 지급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9일 윤재관 청와대 부대변인은 서면브리핑에서 “정부는 재난기본소득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16일 코로나19 수도권방역 대책회의에서도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지사가 재난긴급생활비, 재난기본소득의 지급을 건의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와 지자체 간 향후 토론할 과제” 라며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청와대의 결정이 더딘 것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먼저 경제 수장인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등 관료들의 반대 기류다. 홍남기 장관은 17일 국회 기재위 전체회의에서 “기본소득은 여러 나라가 시도했지만 정착된 나라는 없다”면서 “효율성이 있는지 짚어봐야 하고, 재원 문제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제도의 합리성이나 공감대가 종합적으로 검토돼야 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총선을 앞두고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을 의식했다는 해석도 있다. 심재철 통합당 원내대표는 “기본소득은 총선 노림수 현금살포 포퓰리즘”이라며 “국민 세금을 풀어 표를 도둑질하려는 시도는 꿈도 꿔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같은 당 김용태 의원도 “지금 필요한 것은 재난기본소득이 아니라 자영업자, 중소기업, 도산 직전의 항공, 운송 등의 기업에 대한 과감한 감세 정책”이라며 재난기본소득을 반대하고 나섰다.
또 다른 이유로 ‘기본소득 전도사’로 불리는 이재명 경기지사에 대한 견제심리가 거론되기도 한다. 이재명 지사는 성남시장 시절부터 청년배당을 최초로 실시하는 등 기본소득 제도를 주창해온 인물이다. 경기도정을 맡은 이후에도 기본소득의 필요성, 기대효과, 재원마련 등 로드맵을 마련하고 홍보해온 덕에 기본소득에 관해서는 국내 1인자로 꼽힌다. 그러다 보니 차기 대권 경쟁을 펼쳐야 하는 친문 진영에서 이 지사의 시그니처 정책인 기본소득을 넙죽 수용할 수는 없었을 거라는 해석이 경기도 정가에서 나온다.
지난해 경기도 기본소득 박람회에서도 청와대는 경제수석실이 아닌 일자리수석실의 ‘자영업 비서관’을 보내며 국토보유세와 기본소득보다 지역화폐 쪽을 강조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재명 지사의 국토보유세 당론 채택 요청에도 청와대와 당에서 긍정적인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도 이와 결이 같다는 해석이다.
때문에 청와대가 재난기본소득의 전격적 도입보다 지자체가 지급하고 향후 추경으로 이를 보전해주는 방식을 도입할 거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18일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코로나19국난극복위원회 위원장은 국회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당정청 회의 후 브리핑을 통해 “일부 지자체에서 재난기본소득에 가까운 성격의 긴급지원정책을 펴고 있는데 바람직한 일”이라며 “지자체의 결단에 대해 환영하며 대통령 주재 비상경제회의가 열리면 거기서 많은 논의가 이뤄지고 결정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자체가 긴급 지원하고 거기에 중앙 정부의 보전이 필요하면 추후 추경을 통해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발언이 정부 측에서도 나왔다”고 했다.
이는 사실상 재난기본소득 개념을 받아들이되 지자체에 책임을 미뤄 포퓰리즘 논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읽힌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이 비상경제회의를 통해 재난기본소득을 도입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다. 11조 원이 넘는 추가경정예산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국민 개개인이 추경의 효과를 체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금이나 상품권 등을 직접 지급하는 방안이 여당 내에서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다만 재난기본소득을 도입하더라도 긴급생활지원금 등으로 용어를 바꿔 ‘기본소득’과 선을 그을 거라는 예측이 나온다.
김창의 기자 ilyo2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