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벌써부터 법원 내에서는 찬반 의견이 나뉜다. 특히 고법 부장판사 제도 자체보다는, 이로 인해 법원 내 세대 간 소통단절이 더 심화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1949년 법원조직법이 제정된 이후 71년 동안 유지돼 온 고법 부장판사 제도가 폐지된다. 이로써 법원은 공식적으로 ‘고등 부장판사 승진’ 개념이 없는 조직이 됐다. 사진=고성준 기자
#“판사 독립성 확보” vs “근무 의욕 없어져”
국회는 3월 5일 본회의를 열어 고등법원 부장판사 제도를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법원조직법 일부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대법원장에게 주어진 인사권으로 법관들을 줄 세우기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는 2021년 2월부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기존 고법 부장판사들은 직위를 유지하지만, 이제 법원은 공식적으로 승진 개념이 사라지게 됐다. 종전 법원조직법은 고등법원 재판부에 부장판사 직급을 두고, 부장판사만이 재판장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지방법원 부장판사 가운데 약 10% 정도의 법관만 승진할 수 있었다. 법조계 안에서도 가장 엘리트 조직이라는 법원 안에서 ‘인정’ 받는 판사들만이 가능했는데, 법원장이나 대법관은 이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통과된 개정안에서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직급을 폐지하고, 대신 재판부 구성원 가운데 1명이 재판장을 맡을 수 있도록 규정한다. 부장판사·배석판사로 이뤄진 재판부가 아닌 대등한 경력의 판사들로 재판부 구성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승진을 미끼로 ‘사법부 관료화’를 유도했다는 비판에 따른 조치다.
실제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 첫 해인 2017년에 사법행정개혁의 일환으로 고법 부장판사 제도 폐지를 약속하고 고법 부장 신규 보임을 전면 중단했다. 2017년부터 이미 예상됐던 흐름이지만, 판사들은 이번 조치에 대해 ‘찬반’이 뚜렷하게 나뉜다.
한 판사는 “승진을 기대하며 ‘잘 보이기 위한’ 판결을 하지 않아도 된다. 판사가 소신껏 판단을 하기 위해 재판부가 독립됐다고 하면서, 판사의 판단에 대해 평가를 해 이를 바탕으로 승진 여부를 판가름한 게 고등부장판사제”라며 폐지 결정을 반겼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 역시 “그동안에는 2심, 3심에 사건이 올라갔을 때 바뀌지 않는 판결을 해야 ‘실력 있는 판사’라고 평가하면서 고등 부장판사 승진 가능 여부를 따졌다면, 이제는 비슷한 연차뿐 아니라 모든 판사들이 서로를 평가하게 되는 수평적인 구조로 변화하지 않겠느냐”며 “다양한 관점의 평판이 쌓일 수 있기 때문에 법 해석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 첫 해인 2017년에 사법행정개혁의 일환으로 고법 부장판사 제도 폐지를 약속하고 고법 부장 신규 보임을 전면 중단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근무 의욕’ 어떻게 증진시키나
이미 고등부장으로 승진한 판사들 역시 ‘예상했다’는 반응이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이미 신규 보임을 하지 않는 등, 법원 내에서 폐지가 생각보다 큰 의미는 없다”면서도 “다만 안타까운 것은 어떻게 근무 의욕을 이끌어내려는지가 없다는 점”이라고 우려했다.
실제 법원 내에서는 전보다 근무 강도가 많이 약해진 지 오래라는 후문이다. 고등 부장판사로의 제한적 승진 개념이 없어지면서(1심 부장판사는 근무 연수에 비례해 자동적으로 승진한다) 인정받아야 할 이유가 사라졌고, 자연스레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판사들이 늘었다는 후문이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엘리트 조직이라고 불리는 법원이 그동안 밤늦게까지 열심히 판결문을 쓰고 사건을 처리한 것은 승진하기 위한 ‘평판’을 얻기 위함도 있었다”며 “최근 들어 5년 전에 비해 사건 처리 속도가 늦어진 게 너무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우려했다.
법원 내 웰빙족도 늘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앞선 서울고등법원의 부장판사는 “이제 열심히 일하지 않고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딱 퇴근하는 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시대 흐름이 그렇다고 하지만 그렇게 늦어지는 판결만큼 사건 관계자들이 느끼는 고통도 늘어나지 않나. 근무 의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조치가 없다면 결국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미칠 것”이라고 토로했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예전에는 함께 근무했던 배석 판사들과 정기적으로 식사를 했지만 이제는 먼저 연락이 오지 않으면 부담스러울까봐 만나자고 하지 않는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사진=JTBC ‘미스 함무라비’ 스틸컷.
#자연스레 드러나는 세대 차이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법원 내 세대 갈등이 확인되고 있다. 비교적 연차가 어린 평판사들은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환영의 뜻을 내비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미 승진을 경험한 고등 부장판사들의 경우 “순기능도 있는데 안타깝다”며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분위기는 ‘판사 회의’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직후 서울중앙지법 등 일부 법원은 사무분담에 법관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회의를 여는 사례가 늘었는데, 이때 부장판사 등 비교적 근무 연수가 높은 판사들의 참석률이 낮아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한 부장판사는 “초반에는 몇 차례 가봤는데 다수결로 결정되는 경우도 많고, 원래 옳다고 생각했던 조직 문화가 비판받는 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묘하더라”며 “친한 판사들이 적폐처럼 몰리는 것을 보면서 그냥 안 가고 안 보는 게 나을 듯싶었다”고 설명했다.
밥조 문화도 바뀌었다. 판사들은 외부인과의 접촉이 조심스럽기 때문에 판사들끼리 밥조(組)를 짜서 점식 식사를 함께하는데, 비교적 연차가 높은 판사들이 젊은 판사들과 함께하는 밥조에 끼는 것을 어려워하게 됐다. 전처럼 뭉치는 문화가 사라진 것도 자연스럽게 생긴 흐름이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예전에는 함께 근무했던 배석 판사들과 정기적으로 식사를 했지만 이제는 먼저 연락이 오지 않으면 부담스러울까봐 만나자고 하지 않는다”며 “가까운 동기들이나 가끔 식사하고 연락할 뿐 전보다 다른 판사들과 왕래가 줄었다, 식사도 그냥 혼자 하기도 한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