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자존감에 힘이 붙어야 하는 시절을 지나면 그것도 장애다. 중요한 것은 지적을 하고 지적을 받는 일이 아니라 소통이다. 상대를 인정해야 할 수 있고 상대에게 인정받아야 할 수 있는 소통! 소통이 일어날 때 듣게 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화두가 되고 힘이 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장윤정이 감성적이라면 조영수는 분석적이다. 이 둘이 서로의 옆을 지키며 만들어내는 소통의 화음은 감성과 이성이 둘이 아님을 보여준다. 칸트의 문장을 살짝 비틀면 감성 없는 이성은 공허한 지적질일 수밖에 없고, 이성 없는 감성은 맹목적 메아리일 수밖에 없을 텐데, 어느덧 분석적인 조영수가 따뜻해지기까지 하고, 가끔 장윤정의 분석의 칼이 차갑다 느껴지기도 한다. 함께한 시간과 함께 둘이 서로에게 스민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서로의 색을 지키면서도 서로에게 스민 둘은 좋은 짝이다.
그리고 김호중! 이번에 그를 처음 알았는데, 그의 팬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그가 부르면 모두 명곡이 되는가. ‘태클을 걸지 마’가 그렇고, ‘다시 한 번만’이 그렇고, ‘고맙소’가 그렇다. 있는 줄도 몰랐던 노래들이 그에게 오면 모두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가 ‘고맙소’를 부를 때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왜 울고 있는지, 무엇이 그리 고마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감동을 지키고 싶어 거기서 그냥 TV를 꺼버렸다. 그 곡이 내 마음속 피날레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래하는 그의 태도에서 배운다. 그는 마이크 앞에 서면 고요해진다. 전주를 들으며 노래가 나와야 할 시점을 기다리는 것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것이다. 꼭 명상을 하는 사람의 태도 같다. 자신에게 집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풀어낼 수는 없다. 자기 집중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한편에선 그렇게 집중해감으로써 자신에 대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니 ‘짝사랑’을 부르는 것이다. 오디션의 관점에서 보면 선곡의 실패지만, 새로운 시작은 늘 그렇게 실패의 얼굴을 하고 징검다리를 놓는 것 아닌가.
그는 미운 오리 새끼다. 그가 백조임을 알아보고 그를 키워낸 선생님이 있었다. 한 장면을 보고 나도 그 서수용 선생님의 인품에 반했다. 김호중이 모교를 찾아 이제 트로트 가수가 되었다고 했을 때 기쁨인지 슬픔인지 회한인지 모를 눈물을 닦으며 그래, 거기 뭐가 있는지 가보자며 제자를 안아주는 따뜻한 선생님! 세계적인 성악가로 성장할 거라고 확신한 수제자가 트로트를 하겠다는데 뭐 그리 좋기만 하겠는가. 그런데 자기 기대를 내려놓고 제자를 믿어주고 보듬어주는 선생님인 것이다. 그런 따뜻한 사랑을 받고 성장한 인간이니 그도 세상에 그런 따뜻한 사랑을 흘려주지 않겠는가.
자신 안에 외로움도 있고, 분노도 있고, 그 모든 것을 녹여줄 사랑이 있는 그를 성악 속에 가둘 수 없다. 아마 ‘트로트’ 속에도 갇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 노래하는 영혼일 것이다. 우리 곁에서 생을 노래하는 영혼. 그가 참 소중하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