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23일 부친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영결식에 참석한 신창재 회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신 회장의 사재출연 보도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지난 10월7일 오후 교보생명 홍보실)
최근 재계에 웃지못할 해프닝이 하나 벌어졌다. 교보생명의 한 고위 관계자가 전한 내용을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나, 불과 하루 만에 회사측이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며 번복하는 일이 생긴 것. 특히 이 회사 고위 관계자의 입을 통해 전해진 내용이 생보사의 상장과 관련,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는 핵심 내용이었다는 점에서 업계는 물론 일반 투자자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교보생명측은 이에 대해 ‘대형 오보 사건’이라며 해프닝 쪽으로 가닥을 잡고 덮으려 하지만 이를 둘러싼 의문은 계속 끊이질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해프닝의 발단이 된 것은 지난 7일 오후 교보생명의 오익환 재무담당 부사장이 본사(광화문 빌딩)구내 식당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의 내용이었다. 당초 이날 간담회는 교보생명이 국제 신용평가기관으로부터 신용등급 AA+를 받은 것과 관련, 경영상황 등을 설명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그러나 교보생명측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날의 화두는 엉뚱한 곳으로 튀기 시작했다. 업계에서 약 3개월전부터 떠돌아다니던 루머가 그것이었다. 교보생명이 회사 주식 상장을 위해서 생보사 상장 자문위가 제시한 의견을 수용키로 했다는 것이 핵심 내용.
사실 삼성, 교보, 대한생명 등 주요 생보사들은 10년여 동안 생보사 상장 문제로 ‘된다, 안된다’는 논란을 거듭해왔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현행법상 보험회사는 주식회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주주들의 동의를 얻어 회사를 거래소에 상장시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시민단체 등이 보험사의 상장과 관련해 “보험 계약자의 기여도가 인정돼야 한다”며 ‘유권해석’을 주장하고 나선 부분. 생보사 상장에 따른 이익을 보험 계약자들에게 일부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보험사의 경우 회사나 주주, 계약자들이 모두 회사 발전에 기여했기 때문에 보험사에 가입한 일반 계약자들의 기여도가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생보사의 상장이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
시민단체가 주장한 ‘보험 계약자의 기여도’가 어떻게 보상이 돼야 하는지에 관해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생보사의 상장을 주관하고 있는 자문위는 회사가 계약자의 기여를 어떤 형태로든 인정해줘야 한다는 대원칙만을 세워놓은 상황이다.
정부의 이 같은 입장에 대해 생보사들이 찬성할 리가 만무했다. 업계 1, 3위 기업인 삼성, 교보생명은 그동안 이에 대해 반대의사를 밝혀왔다. 이들은 보험사가 주식회사인 이상 주주가 아닌 일반 계약자에게 상장에 따른 차익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는 것.
정부로서는 시민단체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생보사들을 설득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입장이 계속됐다. 그러나 지난 8월 업계에서는 이와 관련해 새로운 얘기가 돌았다. 얘기의 핵심은 교보생명이 상장 자문위의 의견을 받아들여 계약자 기여도를 인정, 공익재단을 설립하는 방법으로 회사 상장에 대한 이익을 배분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교보생명과 상장위는 공식적인 답변을 거부했지만, 이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소문’에 불과했던 이 문제는 지난 7일 기자간담회에서 다시 불거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언론에 ‘신창재 회장이 사재를 털어 공익재단을 설립키로 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이와 관련해 일부 언론에는 신 회장이 지난 8월 생보사 상장을 위해 사재를 들여 공익재단을 설립할 의사를 생보사 상장 자문위에 이미 전달했다는 내용도 실렸다.
또 신 회장의 사재출연 규모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장 차익의 10∼20%를 계약자 몫으로 인정해 약 2천억∼4천억원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이 전해지자 업계 내부에서는 물론 일반 투자자들까지 술렁거렸다. 무려 10년여간 지루한 공방을 벌였던 문제가 단숨에 해결될 것이라는 섣부른 추측까지 나왔다. 업계 관계자는 “상장에 목을 매고 있는 다른 생보사들로서는 이번 교보의 발표가 업계의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투자자들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 교보측은 이를 전면 부인하고 나섰다. 교보생명은 지난 9일 ‘해명자료’를 내고 “언론에 보도된 공익재단 출연은 신창재씨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평소 소신일 뿐”이라며 “지금까지 견지해온 교보생명 상장에 대한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못박은 것.
교보생명 관계자는 “언론에 보도된 부분 중 과장된 것이 너무 많다. 재무담당 오 부사장의 경우 외국생활을 오래한 탓에 언론 대응에 미숙해 말이 와전된 것 같다. 오 부사장을 통해 전해진 내용은 신 회장의 평소 소신일 뿐이다”고 보도 내용을 부정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날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던 기자들이 모두 ‘오해’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두 명도 아니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기자들이 전부 얘기를 잘못 들은 걸까. 당시 이 자리에 참석했던 기자의 말은 교보생명의 해명과 전혀 다르다.
“오 부사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8월 생보사 상장과 관련해 논의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지난 8월 자문위에 교보생명이 주식회사인 만큼, 주주동의 없이 회사가 공익재단이나 다른 곳에 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라면 신 회장이 사재를 출연할 의사가 있다는 뜻을 전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교보생명과 교보생명에 관한 기사를 게재한 언론사측의 주장이 판이하게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 교보측이 주장하는 ‘해프닝’은 교보가 반론을 제기하고, 몇몇 언론사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일단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교보의 이 같은 반응에 대해 뭔가 석연치 않다는 의견도 있다. 경쟁사 관계자는 “유동성 상태가 좋지 않은 교보생명으로선 주식상장이 시급하기 때문에 묘안(사재출연)을 냈지만, 발표 후 의외로 복잡한 내부사정이 불거지자 다시 없던 일로 덮은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