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데 비단 선진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이비 종교 신도들 같이 역병의 확산 추이와 그 과정에 기어코 일익을 담당하고야 마는 ‘빌런(악역)급’ 인물들의 행태를 보고 있자면 많은 이들의 뇌리에 아마 공통된 생각이 떠올랐을 터다. 아, 좀비 아포칼립스가 따로 있는 게 아니구나!
상황이 이렇기 때문인지 요즘 우리나라에선 좀비물이 유난히 호황(?)이다. 넷플릭스의 ‘킹덤’이 불러일으킨 인기에 다시 소환되고 있는 ‘부산행’, 그리고 방탈출 카페의 TV예능화로 화제를 모은 ‘대탈출’의 압도적이기까지 한 좀비 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도 이젠 이 분야에서 변방(?)은 아니게 된 셈이다.
#좀비의 정체, 그리고 대중문화에서의 좀비
본래의 좀비는 아이티의 종교, 부두교의 주술로 되살아난 시체, 또는 살아 있는 인간의 지성과 언어를 약물로 앗아 살아 있으되 인간으로서는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만든 대상을 뜻한다.
아이티의 부두교는 토착민 태반이 학살당한 자리에 끌려와 노예로 정착 당한 아프리카인들의 주술문화와 원 토착민의 토속 신앙, 서구에서 이식된 가톨릭 신앙의 미사 형식과 생사관 등이 뒤섞여 만들어진 종교다. 아이티가 서구 열강들로부터 독립하는 과정과 그 후의 질서 정립 과정에서 좀비는 아이티 민간에 전승되어 온 일종의 전설이 되었다. 직접 아이티를 탐사해 ‘나는 좀비를 만났다’를 낸 인류학자 웨이드 데이비스는 산 자를 좀비로 만드는 독의 정체를 밝혀내기도 했다.
한데 독의 정체와는 별개로 웨이드 데이비스의 탐사가 화제를 모은 건 그가 확인한 실제 좀비 제조 과정과 그 복잡다단한 배경 때문이다. 실제로는 진짜 주술이라기보다는 지역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자들을 처단하는 방식으로 좀비화가 쓰인 것이다. 죽이진 않지만 사회에서 문자 그대로 매장해 잊힌 자로 만드는 처벌 방식으로, 식민지 시기의 저항을 이끈 비밀 단체들과 현 집권 독재세력의 연결이라는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 부두라는 종교적 맥락이 복합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실상이 세밀한 탐사를 통해 드러난 건 비교적 근래라 할 1980년대로, 대중문화에서 흥밋거리 소재로 등장한 건 그보다 한참 전 아이티를 점령했다가 막 놓았던 1930년대의 미국에서였다.
강풀 작가의 ‘당신의 모든 순간’. 좀비 소재 러브스토리로 사회 풍자를 해냈다.
그리고 이 줄기에, 되살아난 시체이되 뱀파이어가 아닌 시체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특징까지 부여한 작품이 1968년 조지 로메로의 영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다. 먹힌 인간이 되살아나 지성을 잃은 채 또 다른 인간고기를 찾아 헤매는 설정 때문에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좀비물의 형식과 틀을 정립한 작품으로서 인정받는다.
#좀비물은 현실 정치와 사회의 반영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로도 어느덧 반세기가 넘게 흐른 시점이다 보니, 좀비 장르에도 이성을 완전히 놓지 않는 좀비가 나오거나 심지어 영화 ‘웜바디스’처럼 인간과 사랑을 하려는 좀비 같은 변주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좀비의 기본적인 특성인 움직이는 시체이자 지성은 사라진 존재이고 떼로 모여 다니며 물리면 똑같이 좀비가 된다는 요소는 큰 틀에서 좀비 장르의 기초 약속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보통의 좀비물은 좀비 떼의 압도적인 비주얼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와 이 좀비 떼에 맞닥뜨린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대응하느냐를 그려내는 데에서 초점을 맞추게 된다. 한데 좀비물이 독특한 건 이 과정에서 작중의 당대 민중, 대중들의 입장이나 처지, 사회 구조에 관한 은유를 담아내는 틀로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좀비물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바는 결국 좀비로 말미암은 아포칼립스(대재앙)다. 즉 좀비 때문에 세상이 망하는 풍경이고, 좀비들은 죄다 인간이었던 자들이며, 어쩌면 나나 내 가족일 수도 있었다. 이런 구도 아래에서 무엇이 이들을 좀비화하게 했는가를 생각하면 결국 좀비들이 출현한 시점의 인간 세상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좀비물이 지극히 편리한 공포 장르의 장치인 듯 보이면서도 다분히 현실 정치와 사회의 반영으로 해석되곤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는 지금 이 시점 가장 한국적인 좀비 아포칼립스의 결정체다.
딸이 좀비가 됐다는 설정을 보이는 이윤창 작가의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은 부성애와 더불어 타자화와 혐오가 지배하는 우리네 모습을 보여주며, 이은재 작가의 ‘1호선’은 감기인 줄 알았던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좀비화해 사실상 국가로서의 기능이 붕괴한 한국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계에 내몰린 인간들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의 밑바닥을 가차 없이 들춰 내보인다.
한편 잔인함의 방향이 완전히 다른 좀비물을 찾는다면 미역의효능 작가의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를 읽어볼 만하다. 어째선지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해 자살하려던 70대 언어 장애인 할머니, 그리고 엄마가 좀비가 되어 아빠를 잡아먹는 꼴을 보고 떠나온 젊은 여성의 조합은 어디로 봐도 최약체지만 그 둘은 그저 잠시 함께 있고, 함께 있는 겨를에 인육을 구하기 위해 멋대로 문을 따고 들어온 마을 사람(남성 좀비)를 ‘처리’해낸다.
헐렁해 보이는 그림과 너무나 담백한 대사 처리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 작품이 무서운 점은 좀비가 이성을 잃거나 외모가 바뀌지도 않고 다만 입에 인육이 당기게 될 뿐이라는 설정이다. 이 세계관은 멀쩡한 얼굴로 약자(특히 여성)을 겁박하고 괴롭히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회 구조를 예리하게 반영한다. 할머니와 젊은 여성의 함께 살기는 극단적인 여성혐오 사회에서 여성들이 연대하는 모습의 반영으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야말로 지금 이 시점 가장 한국적인 좀비 아포칼립스의 결정체가 아닐까 싶다.
만화칼럼니스트 iam@seochanhw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