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미래당이 2월 18일 의원총회를 열고 셀프제명을 의결했다. 사진=박은숙 기자
셀프제명은 비례대표 의원들이 의원직을 유지하려 자신들의 제명 절차를 직접 진행하는 것을 일컫는다. 공직선거법 제192조(피선거권상실로 인한 당선무효 등)는 비례대표 의원의 의원직 상실 조건을 ‘비례대표 국회의원 또는 비례대표 지방의회의원의 당선인이 소속정당의 합당·해산 또는 제명 외 사유로 당적을 이탈·변경하거나 두 개 이상의 당적을 가지고 있는 때’라고 명시하고 있다. 비례대표 의원이 당적을 옮기려면, 제명이나 합당 혹은 정당 해산 등의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규정이다.
셀프제명은 그간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 여겨졌다. 그런데 2020년 2월 셀프제명은 현실이 됐다. 2월 16일 바른미래당 의원총회는 비례대표 의원 9명(김삼화 김수민 김중로 신용현 이동섭 이상돈 이태규 임재훈 최도자 의원)에 대한 제명을 결의했다. 의원총회에 참석한 의원들이 자신들 손으로 직접 제명안을 통과시켰고, 이들은 당을 나왔다.
셀프제명 사태 이후 바른미래당은 대안신당, 민주평화당과 합당했다. 그리고 민생당이 출범했다. 민생당은 법원에 “바른미래당 시절 ‘셀프제명’을 의결한 비례대표 의원 8명에 대해 제명 효력을 정지해 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냈다. 셀프제명 9명 중 최도자 의원은 민생당에 재합류해 가처분신청 대상 범위에서 제외됐다. 3월 16일 서울남부지방법원은 민생당이 낸 가처분신청을 전격 인용했다.
서울남부지법 민사51부(부장판사 김태업)는 “정당에서 비례대표가 제명 대상자로서 의결에 참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헌법이나 공직선거법, 국회법, 정당법 등 관련 규정 및 입법 취지에 어긋난다”는 설명과 함께 민생당의 손을 들어줬다. 이로써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였던 셀프제명은 사법부 제지를 받게 됐다. 법원의 가처분신청 인용 결정에 따른 후폭풍을 정면으로 맞은 건 셀프제명 당사자들이었다.
미래통합당, 국민의당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전 바른미래당계 비례대표 의원들은 탈당·불출마·복당 등 각자 입장정리에 나서게 됐다. 미래통합당에서 지역구 공천을 받은 김삼화 김수민 김중로 이동섭 의원은 민생당을 탈당해 ‘전직 의원’ 신분으로 이번 총선을 치르게 될 것이 유력하다. 국민의당에 입당해 비례대표 후보자 순번(2번)을 부여받은 이태규 의원은 이미 민생당에 탈당계를 낸 뒤 의원직을 상실한 상태다. 미래통합당 공천에서 탈락한 신용현 임재훈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했다. 임재훈 의원은 민생당으로 복당했다. 무소속 신분으로 남아 있던 이상돈 의원은 조만간 민생당으로 복당할 전망이다.
민생당이 쏘아 올린 ‘셀프제명 저지’라는 공은 정치권 전반에 걸쳐 파장을 낳았다. 총선 이후 원내 구성원 100%가 비례대표 의원으로 채워질 예정인 ‘비례 정당’들의 재결합 셈법이 복잡해진 까닭이다. 일단 법원 판단으로 거대 양당의 재결합 시나리오는 외통수에 몰렸다. 당대당 통합 경우의 수론 ‘정당 해산 이후 합당’과 ‘흡수 통합’ 두 가지 옵션이 거론된다.
2월 5일 열린 미래한국당 중앙당 창당대회에 참석한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와 한선교 전 미래한국당 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이를 두고 한 현역 의원은 “비례 정당이 선거 이후 의석을 얻게 되면, 당 내부에서 ‘독립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도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입장이 다를 수 있는 것 아니냐”면서 “총선 이후 비례 정당의 행보는 예측불허”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비례 정당에 대한 ‘내부 단속’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선 미래통합당은 미래한국당 공천 과정에서부터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래통합당 지도부는 3월 16일 미래한국당이 발표한 비례대표 공천 결과에 반발했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3월 19일 당 최고위원 회의에서 “이번 총선의 의미와 중요성을 생각할 때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공천 결과를) 대충 넘어갈 수 없다.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래통합당 지도부 반발에 미래한국당은 비례대표 공천 결과 수정안을 마련했다. 수정안은 3월 19일 미래한국당 선거인단 투표에 부쳐졌지만 부결됐다. 공천과 관련해 당 안팎으로 반발에 부딪힌 미래한국당 지도부는 총사퇴했다. 3월 20일 미래한국당은 원유철 의원을 신임 당대표로 추대했고, 새로운 당 지도부를 구성했다. 한 미래통합당 당직자는 “미래한국당 신임 지도부 취임은 미래통합당이 선거 이후에도 비례 정당의 통제권을 쥐려는 포석일 것”이라고 했다.
손을 맞잡은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 당 대표. 사진 왼쪽부터 우희종 더불어시민당 공동대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최배근 더불어시민당 공동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의 속사정은 더욱 복잡하다.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탄생한 더불어시민당은 출범 당시부터 ‘비례 연합 정당’을 모토로 삼았다. 비례 연합 정당은 ‘비례 위성정당’ 미래한국당과의 차별화 전략 일환이었다. 비례 연합 정당은 선거에서 비례대표 의원을 최대한 많이 배출한 뒤, 당선 의원을 민주당 등 연합 참여 정당에 재분배하는 것을 골자로 출범했다.
3월 18일 최배근 더불어시민당 공동대표는 ‘당선자들과 연합정당 거취’와 관련해 “(당선자들은) 각 정당으로 복귀하고, 정당 소속이 아닌 분들은 더불어시민당에 남거나 무소속으로 가거나 개인의 판단에 맡길 수 있다”고 밝혔다. 셀프제명이 활용 불가능한 옵션이 되면서 더불어시민당은 새로운 ‘의원 분배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정치권 또 다른 관계자는 “더불어시민당이 ‘연합’ 콘셉트를 포기하고 더불어민주당과 당대당 통합을 진행할 경우 미래한국당을 향해 쏟아냈던 비판이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치평론가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연구위원은 “셀프가 아닌 셀프제명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채 연구위원은 “한국 정치에선 의원들이 당원 눈치를 보기보다, 당원들이 의원 눈치를 보는 성향이 강하다”면서 “당원들이 의원들의 의도에 따라 의사 결정을 대신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채 연구위원은 “법원의 ‘셀프제명 무효 가처분신청’ 인용 결정의 핵심은 의원 스스로가 자신들을 제명하는 걸 제지한 것”이라며 “의원총회가 아닌 대의원회나 중앙위원회 등 더 큰 대의기구가 의원들의 제명을 결정한다면, 셀프 아닌 셀프제명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불법은 아니지만 적절하지 않은 행태가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채 연구위원은 “선거가 끝나면, 각 정당이 전략적 판단에 따라 재결합이 아닌 1+1 연합정치를 할 가능성도 있다”면서 “이 경우엔 복수 정당이 한목소리를 내는 착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