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고 있던 친이명박계 역시 이번 공천에서 복귀에 성공했다. 반면 경쟁세력인 친박근혜계는 사실상 몰락했다. 친이계 세력 확장이 향후 당권의 변수가 됐다. 대구 수성을에 출사표를 던진 홍준표 전 대표는 TK(대구·경북) 맹주를 노리며 원내 입성 시 당권 쟁탈을 예고하고 있다.
2017년 3월 24일 당시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왼쪽)과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을 마친 뒤 행사장을 떠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친황계는 맥을 못 췄고, 친유계는 약진, 친이계는 복귀, 친박계는 퇴장으로 요약된다.”
통합당 핵심 인사는 이번 4·15 총선 지역구 공천 결과를 이렇게 평가했다. 계파 간 ‘흥망성쇠’가 엇갈린 셈이다. 특히 ‘주군’이 잠행하는 와중에도 공천에서 약진한 친유계의 본선 성적표를 당내에선 주시하는 모습이다.
유승민 의원은 2월 9일 새로운보수당과 자유한국당의 신설합당 추진 및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두문불출했다. 황 대표가 한국당에 이어 통합당에서도 당권을 유지한 것과 반대의 길을 택한 셈이다. 유 의원은 3월 26일 천안함 피격 10주기를 맞아 자신의 페이스북에 추도 글을 올렸다. 46일 만에 내놓은 메시지로, 그만큼 그간 목소리를 아껴왔다.
그럼에도 친유계는 이번 공천에서 20명가량 생존했다. 수도권에서 이혜훈(서울 동대문을) 오신환(서울 관악구을) 유의동(경기 평택시을) 지상욱(서울 중·성동을) 등 현역 의원을 포함해 진수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서울 중·성동갑) 구상찬 전 의원(서울 강서갑) 김성동 전 의원(서울 마포갑) 이준석 최고위원(서울 노원병) 새보수당 영입 1호 인사 출신인 김웅 전 부장검사(서울 송파을) 등이 대표적이다.
보수 텃밭인 TK에서도 친유계는 약진했다. 대표적 친유 인사인 김희국 전 의원은 친박 핵심 김재원 의원(3선)이 컷오프(공천 배제)된 경북 군위·의성·청송·영덕에서 경선 승리했다. 측근인 강대식 전 동구청장은 대구 동을에, 류성걸 전 의원은 대구 동갑에 공천 확정됐다.
반면 친황계는 공천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김우석 당대표 정무특보, 조청래 상근특보, 이태용 여의도연구원 부원장, 원영섭 당 조직부총장 등 측근 원외 인사 상당수가 고배를 마셨다. 현역 의원 중에는 추경호(대구 달성) 정점식(통영고성) 의원 등만 살아남았다.
친유계와 친황계 희비가 엇갈린 것은 보수통합을 거치며 위상을 유지한 공천관리위원회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형오 전 위원장, 이석연 부위원장, 김세연 의원 등 공관위를 이끈 인사들은 친황계와는 거리가 멀다. 공관위 한 관계자는 “통합의 의미를 살리다보니 중도 표심을 확보할 수 있는 인사들이 공천에서 살아남는 모양새가 됐다”며 “계파를 따지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론 유승민계가 상당수 진출하게 된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공천 결과는 총선 이후 성적표에 따라 세력 재편 가능성을 엿보이게 한다. 친유계 인사들이 대거 생환한다면 유승민 의원이 등판할 수 있는 여지도 넓어지는 셈이다. 다만 황 대표가 출사표를 던진 서울 종로에서 승리하고 총선 대승을 견인할 경우 황 대표의 대권 발판도 견고해진다.
수도권 한 중진 의원은 “유승민계의 생환은 자연스레 유승민 복귀의 신호탄이 될 수 있지만 황 대표가 총선에서 좋은 성적표를 낼 경우 총선 때 별다른 역할을 안 한 유 의원의 입지는 줄어들 수 있다”며 “어찌됐건 대권 라이벌의 경쟁 구도는 가속화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번 공천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친이계 복귀와 친박계 퇴장이다. 앞서 친이계와 친박계는 보수 양대 세력을 이루며 공천에서 엎치락뒤치락해왔다. 지난 18대 총선을 앞두곤 친박계가, 19대 총선에서는 친이계가 공천 학살을 당했다. 20대 총선의 경우 ‘진박’ 공천 논란이 불거지며 보수 세력 몰락의 단초가 된 바 있다.
이번 공천에서 친이계는 정태근 전 의원(서울 성북을) 조해진 전 의원(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 김은혜 전 청와대 부대변인(경기 성남 분당갑) 박진 전 의원(서울 강남을) 박정하 전 청와대 대변인(강원 원주갑) 이달곤 전 장관(경남 창원·진해) 등이 수도권과 영남권에서 고루 공천을 받았다.
반면 친박계는 친박 핵심인 김재원 정책위의장과 윤상현 의원 탈락을 시작으로 세력 근거지인 TK에서마저 천영식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경북 군위·의성·청송·영덕) 김재수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대구 동구을) 등 측근 인사들이 고배를 마셨다.
이 같은 결과는 친이계인 김형오 전 위원장과 보수통합 국면에서 혁신통합추진위원장을 맡은 박형준 공동선대위원장이 영향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당 핵심 관계자는 “보수통합을 시작할 때부터 외곽에서 친이계 좌장인 이재오 전 의원 등 친이계 인사들이 다수 역할을 했다”며 “복귀를 노리며 절치부심한 결과가 먹힌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미래통합당 국회의원선거 후보자 면접에 참가하는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향후 당권 경쟁에서 친이계가 변수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본선에서 살아온 친이계가 황 대표를 ‘구심점’ 삼아 당내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황 대표와 친이계의 동거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반론도 있다. 친박계 한 의원은 “친박계는 전당대회에서 황 대표를 지원한 측근들이다. 반면 친이계는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다”며 “황 대표 측근이 다수 낙천한 것은 친박계를 외면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황 대표 측도 ‘안전장치’를 마련해놓은 상황이다. 최근 공천 파동이 대표적인 예다. 공관위 결정을 최고위에서 뒤집으면서 측근인 민경욱 의원은 선거법 위반에도 불구하고 끝내 공천을 받았다.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에서는 한선교 전 대표가 황 대표 영입인재들을 비례 순번에서 상당수 비당선권에 배치했지만, 황 대표가 ‘공천 개입’ 논란까지 무릅쓰면서 거세게 반발해 한국당 지도부와 공관위원장 교체까지 감행하는 파장을 겪었다. 그 결과 ‘황교안 키즈’들은 대거 당선권 순번을 얻게 됐다.
3월 26일 전격 이뤄진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영입도 황 대표 리더십에 힘을 실어준다. 김 전 대표가 총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선거판을 총 지휘하면, 황 대표는 종로 선거에 집중할 수 있다. 또한 총선 성적표에 대한 부담감 및 책임론을 일부 분산시킬 수도 있는 포석이다.
하지만 황 대표에겐 또 다른 위협 세력이 있다. 컷오프 당해 무소속으로 대구 수성을에 출사표를 던진 홍준표 전 대표다. 그는 “당 주도세력은 반드시 바뀔 것”이라고 경고했다. 앞서 홍 전 대표 컷오프는 황 대표의 대권주자 견제가 담겼다는 해석이 당내 중론이다. 홍 전 대표가 총선에서 살아 돌아올 경우 황 대표에 대한 즉각 반격에 나설 수 있다.
통합당 전당대회는 총선 이후 7월로 예정돼 있다. 지역구 공천에선 힘을 못 썼지만 비례 공천 등 안전장치를 마련해 둔 황 대표와 약진한 유승민계, 복귀한 친이계, 홍 전 대표 생환 등 권력 지도는 복잡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한 수도권 중진 의원은 “본선 결과를 봐야 하기에 아직 예단하긴 이르지만, 총선 이후 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라고 내다봤다.
권준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