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부터 이어진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전기차용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공방이 그 끝을 향하고 있다. ITC는 지난 2월 SK이노베이션에 조기패소 결정을 내리면서 LG화학 손을 들어줬고, 한 달여가 지난 최근 구체적인 결정 내용과 근거가 담긴 판결문을 공개했다. 패색이 짙어진 SK이노베이션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다. LG화학 측과 원만한 협상을 이끌어내는 방법이 현재로선 최선의 시나리오로 꼽힌다. 다만 LG화학 쪽 피해규모를 산정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합의 과정에서 발생할 양쪽 이견이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LG화학이 입주한 서울 여의도 소재 LG트윈타워 전경. 사진=박은숙 기자
# ITC “SK이노 증거인멸, LG화학 피해 명백”
ITC는 지난 3월 21일 홈페이지에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소송 조기패소 승인 판결문을 공개했다. 130쪽 분량의 판결문의 핵심은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행위(Spoliation of evidence)’. 판결문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소송을 인지한 2019년 4월부터 증거 보존 의무가 발생했지만 “SK이노베이션이 소송과 관련된 문서에 대해 의도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삭제하거나 삭제하도록 방관했다”는 것이 ITC의 판단이다.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과 포렌식 명령 위반 등은 ‘법정 모독’이라는 점도 판결문에 적시했다. ITC는 소송 과정에서 증거 보존을 제1원칙으로 삼는다.
그동안 SK이노베이션은 문서 삭제는 범행 의도 없이 보안 점검과 통상적인 업무 과정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ITC는 판결문에서 “통상적인 업무 과정에서 정당하게 문서가 삭제됐다면 문서 삭제를 위해 발송된 지시를 삭제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SK이노베이션은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문서를 삭제해 완전한 사실관계 자료(증거) 확보 자체를 방해했다”며 “(이러한 행위로 인해) LG화학이 제대로 소송을 진행할 수 없었고 판사도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재판을 진행할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ITC는 LG화학의 영업기밀 유출 피해 주장에 대해서도 “피해를 본 것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ITC는 판결문에서 그동안 쟁점이었던 ‘SK이노베이션이 수입품에 LG화학의 영업비밀을 사용했는지’, ‘LG화학의 정보가 영업비밀이 맞는지’ ‘침해품 수입으로 인해 미국 내 산업에 실제로 피해가 있는지’ 등이 모두 명백하게 밝혀졌다고 판단했다. ITC는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행위와 LG화학의 피해 사실 등을 종합해 “(조기패소 결정은)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처벌뿐만 아니라 다른 사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유사 위반 행위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LG-SK이노 합의 전망…배상금은 얼마나?
조기패소 판결은 일종의 예비 판결이다. 다툼의 여지가 많지 않을 경우 소송의 경제성 등을 고려해 사전적으로 내리는 결정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변론 등 다른 절차는 진행되지 않는다. 오는 10월 최종 결정이 내려진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3월 3일 ITC에 조기패소 결정에 대해 이의제기를 신청했다. 다만 이번 조기패소 결정에 큰 영향은 주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ITC 통계(1996~2019년)를 보면,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예비 결정이 최종 결정에서 뒤집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특허소송에서도 약 90%로 예비결정 원안대로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또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최근 ITC의 불공정수입조사국(OUII)은 SK이노베이션의 이의제기에 대한 의견서를 내고 “조기패소 결정에는 오류나 재량권 남용이 없었다”며 “이의제기를 받아들여선 안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ITC는 오는 10월 최종 결정과 함께 미국 관세법 337조(저작권 침해 제재 규정) 위반 여부와 수입 금지 등 조치 등을 확정할 방침이다. 조기패소 결정이 원안대로 통과되면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으로부터 불법적으로 영업비밀을 침해해 생산했다고 인정되는 배터리셀과 모듈 등 관련 부품·소재에 대한 미국 내 수입이 금지된다. 이 경우 SK이노베이션의 미국 배터리 관련 사업 전반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SK이노베이션은 현재 약 2조 원을 투자해 조지아에 EV용 리튬이온 배터리 공급을 위한 제조 공장을 짓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이 있는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그룹 본사 전경. 사진=일요신문DB
협상은 SK이노베이션이 신청한 이의제기 결과가 발표되면 본격화될 전망이다. 유력한 합의 시나리오는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에 과거 손실 등을 포함해 산정한 배상금액 등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수년 전부터 영업비밀 침해와 관련된 문서들을 삭제해온 것으로 파악된 만큼 증거 확보가 사실상 불가능해 피해 규모 산정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양측 의견 차가 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합의금도 관건이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양측은 “아직까지 합의와 관련해 결정된 내용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배터리 업계에선 그동안의 피해 규모 및 소송비용 등을 고려하면 이번 합의금이 최소 5000억 원 수준은 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천문학적인 합의금에 더해 협상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SK이노베이션의 영업손실이 불가피한 만큼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그룹 오너들의 ‘역할론’도 나온다. 지금까지 공방이 이어지는 동안 오너들이 직접 나선 적은 없다. 지난해 추석 연휴 이후 신학철 LG화학 부사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이 만났지만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했다. 오히려 LG화학은 최고경영자 회동 이후 ITC에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행위 추가 증거자료를 제시하며 조기패소를 요구하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영향력이 크지만 중국과 일본 등의 경쟁 업체들의 성장 속도는 무시 못할 수준”이라며 “갈등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사업에 집중하는 게 양쪽에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최고경영자 회동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지만, 최근 새 국면에 접어들었고 오너들이 나서면 ‘원만한 합의’에도 속도가 붙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