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박사방 등 이른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으로 알려진 디지털 성범죄가 텔레그램이 아닌 다양한 플랫폼에서 벌어지고 있다. 텔레그램은 가장 큰 유통창구 가운데 하나였을 뿐 이미 다양한 곳에서 성착취물이 퍼지고 있는 것. 특히 2019년 9월 일부 운영자가 구속되자 남은 운영자들은 일찌감치 돌파구를 찾았다. 구속된 조주빈과 태평양도 텔레그램 외에 위커와 와이어 등의 메신저에서 성착취물을 공유해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종로경찰서 앞 포토라인에 선 조주빈. 사진=고성준 기자
디지털 성범죄의 역사는 그 뿌리가 깊다. 텔레그램 이전에는 소라넷과 제2의 소라넷이었던 av snoop, 그리고 텀블러 등이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양쪽 모두가 미성년자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텀블러가 유행하면서부터다. 소셜미디어의 일종인 텀블러에서 유행한 건 ‘지인능욕’이라는 성착취물이다. 일정 금액의 돈을 지불하고 여성 지인의 사진과 이름, 나이 등의 정보를 넘기면 운영자는 이를 나체 사진 등 음란물에 합성한 뒤 이를 게재했다. 게시물 밑에는 소설에 가까운 성희롱과 피해자의 신상 정보가 적혔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성희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빈번했다.
2017년 이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텀블러 내 음란물 규제를 강화하자 새로운 플랫폼인 텔레그램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더욱 자극적인 성착취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보안 메신저를 통한 음란물 거래는 적발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컸던 탓이다. 시작은 와치맨의 ‘고담방’이었다. 애당초 자신이 운영하는 음란물 사이트를 홍보할 수단으로 만든 방이었으나 갓갓의 ‘n번방’ 개설 이후에는 n번방으로 통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n번방 입장을 원하는 사람들은 고담방에 성착취물을 올리거나 돈을 지불해야 했다.
갓갓은 해킹이나 경찰 사칭 등으로 얻은 개인정보를 빌미로 피해 여성들에게 가학적인 영상을 찍을 것을 강요했다. 갓갓은 피해자들에게 “약 1년간의 노예 생활을 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했으나 영상 대부분은 유출됐다. 약 8개월 동안 범죄를 이어오던 갓갓은 2019년 8월쯤 8개의 방 가운데 7개를 폐쇄하고 돌연 자취를 감췄다. 남은 방 1개는 또 다른 운영자 켈리가 이어 받았다. n번방 폐쇄 이후에도 조주빈의 ‘박사방’, ‘태평양원정대’, ‘프로젝트n번방’ 등 수많은 성착취 방이 생겼다 사라지며 피해자를 양산했다. 현재 운영자 대부분이 검거되었으나 n번방을 만든 갓갓은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다.
문제는 성착취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난 현재도 플랫폼만 바뀔 뿐 디지털 성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와치맨, 켈리 등 일부 n번방 운영자의 구속 이후 남은 사람들은 ‘위커’와 ‘와이어’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위커와 와이어는 보안성에서 텔레그램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메신저 앱이다. 텔레그램에서 유출된 영상은 ‘디스코드’로 흘러갔다. 디스코드는 게이머들이 사용하는 메신저로 주로 10대 남성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성착취물은 청소년 사이에서 5000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이 밖에도 라인, 온라인 게임 채팅창 등 일상 곳곳에서 성착취물 유통 사례가 적발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특정 플랫폼을 겨냥해 가해자를 적발하는 단계에서 끝나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 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디지털성범죄는 ‘텔레그램’에서 끝나지 않는다”며 “n번방 영상이 10대들에게 유통된다는 점은 스너프 필름 수준의 가학적인 영상을 보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강간이 유흥거리로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어떤 성문화를 공유해오고 있었는지 반성해야 한다. n번방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