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일요신문] “생애 가장 영광스러운 날을 맞고 이렇게 떠납니다. (중략) 영원한 효도와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대한민국 육군 하사 정든산.”
정든산 하사가 남긴 유서는 고작 253글자에 불과했다. 유서라기보단 짧은 메모에 가까운 글에선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드러났다. ‘생애 가장 영광스러운 날’은 하사 임관 날을 두고 한 말이었다. 생의 마지막을 꾹꾹 눌러 담아 가족에게 마지막 안부를 전한 정 하사는 마지막에 ‘대한민국 육군 하사’라는 말을 빠트리지 않았다.
정 하사는 전문하사였다. 현역 병사로 입대해 복무 기간을 채운 뒤 직업 군인을 선택했다.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정 하사는 한 번도 ‘하사’로 불리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전문하사 임관 직후 3박 4일 위로 휴가를 다녀온 정 하사는 복귀한 바로 그 날인 2015년 12월 6일 자신의 숙소에서 숨을 끊었다. 하사로 정식 출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자살하고 싶을 때 대처법’, 정 하사가 자신의 휴대전화로 마지막에 검색한 문구였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기대했던 건지도 모른다. 인터넷 속 어떤 조언도 충동을 다스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시 22세의 정 하사는 하나의 별이 사라지듯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맞이한 뒤 짧은 생을 마쳤다.
병사들이 K-4 고속유탄기관총 사격 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군은 수사 결과 삶을 비관한 정 하사가 단순 자해 사망했다고 결론지었다. 가정불화와 가족, 친구 등 주변의 전문하사 임관 반대, 전문하사 보직 수행과 관련해 부담감을 이기지 못했다는 설명이었다. ‘일반사망’으로 분류됐다.
정 하사 가족은 군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IMF 때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부모가 별거를 시작했지만 가정불화로 보기 어려울 만큼 교류를 꾸준히 하고 지냈다. 무엇보다 정 하사의 임관 결정을 반대하는 가족은 없었다. 오히려 엄마, 아빠는 물론 이모, 삼촌 등 온 가족이 정 하사의 결정을 지지했다. 가족들은 임관을 마치고 위로 휴가를 나온 정 하사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우리 아들 멋있네. 정이 가득하고 든든한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산이 되거라. 우리 아들 축하하고 파이팅하시고 필승! 사랑한다. 힘내라!”(아버지), “아들~ 멋져~”(어머니), “오우 하사 계급장이네, 축하한다.”(삼촌), “군 복무 잘 마친 우리 든산이 너무 대견하다. 하사 생활도 열심히 하리라고 믿는다.”(이모)
사건 진상규명을 의뢰 받은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8개월 조사 끝에 정 하사 죽음의 원인으로 ‘위규보직’을 지목했다. 규정에 어긋난 보직이 정 하사를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로 밀어 넣었고,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봤다.
2015년 12월 3일 임관 날, 정 하사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K-4(고속유탄기관총) 화기중대로 발령이 났다는 말이었다. 뜻밖이었다. 정 하사는 정보과 표적분석부사관으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정 하사도 그런 줄 알았다. 정 하사는 640타 속기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2014년 2월 18일 이병으로 입대해 21개월 동안 정보병으로 근무해왔기 때문에 정보병에 최적화돼 있었다. 정보병과로 지원했고 정보병과로 발령 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육군본부 인사사령부의 인사발령 명령서에서도 정 하사의 보직은 표적분석관이었다.
누군가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 있지만 정 하사에겐 극심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정보병으로 근무해온 정 하사는 K-4 화기를 다뤄보긴커녕 제대로 살펴본 적도 없었다. 하사 계급장을 단 간부가 병장, 아니 이병보다 아는 게 없다면 일반 병사들에게 무시당할 게 뻔했다. 군 생활지도기록부에 따르면 정 하사는 ‘내성적이지만 남들에게 답답하게 보이지 않게 항상 빠르게 움직이려고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정 하사는 직접 남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성격이었으면 한다는 소망이 있다고 쓰기도 했다. 정 하사는 군 생활 동안 자신이 받은 포상 휴가를 후임에게 양보하거나, 근무를 대신 서기도 했다고 한다.
정 하사는 휴가 내내 새벽 2시 전엔 잠들지 못했다. 휴가 첫날엔 새벽 2시 13분까지 깨어있었다. 휴대전화를 붙들고 ‘K-4’를 검색해 사진을 찾아보거나 ‘K-4를 아시나요’라는 제목의 게시 글을 읽기도 했다. 다음 날 일어나선 아침 8시 11분 ‘전문하사 전역 신청’을 검색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오후 시간을 제외하곤 아침, 저녁으로 혼자 있을 땐 어김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검색을 이어갔다.
정 하사는 휴가 기간 동안 대대장에게 두 번 전화를 걸었다. 처음 통화에선 보직 변경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음 통화에선 조기 전역을 의뢰했지만 어렵다는 답을 받았다. ‘전문하사 조기 전역’, ‘간부 탈영’, ‘불명예 전역’, ‘현역 복무 부적합’, ‘고통 없는 자살’ 등 시간이 흐를수록 정 하사가 검색하는 단어는 그의 심리 상태에 따라 변했다.
정 하사는 휴가 사흘 동안 어머니와 164회, 작전과장과 21회 통화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복귀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정 하사는 점점 구체적인 단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농약’, ‘할복’, ‘목매달기’, ‘고통 없는 자살’ 등이었다. 결국 정 하사는 되돌릴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K-4 화기중대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정 하사 부대의 대대장(중령)은 정보과보다 화기중대 인원이 시급하다고 판단해 정 하사 보직을 ‘표적분석부사관’에서 ‘K-4 분대장’으로 임의로 바꿨다. 부대 안에서도 반발은 있었다. 정 하사를 맡을 예정이었던 작전과장(소령)이 대대장에게 정 하사의 보직 변경을 철회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대장의 명령은 부대 내에서 절대적이었다.
상당수 군 간부들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세부특기와 관계없는 보직 이동은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다. 육군 규정 112 ‘부사관 인사관리 규정’에 따르면 영관급인 대대장이 장성급 지휘관의 허가 없이 임의로 부사관을 병과 세부특기와 다른 직위에 보직할 수 없다. 하지만 세부특기와 관계없는 보직 이동은 ‘효율적 부대 관리’라는 명목 아래 흔하게 또 당연하게 이뤄지던 관행이었다. 이를 거역하는 일은 ‘나약함’, ‘명령 불복종’으로 치부돼 온 것도 사실이다.
결국 정든산 하사 사건은 ‘위규보직’이 인정된 첫 사례가 됐다. 국방부는 정 하사가 규정에 어긋난 보직 발령이 자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인정했다. 정든산 하사 사건을 조사한 한상미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과 2팀장은 “정 하사 소속 대대장은 자신의 인사 명령이 규정 위반인 줄 몰랐고, 책임질 게 있으면 책임지겠다고 말했다”며 “개인의 책임을 따지기 이전에 군 인사의 구조적 문제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지휘관의 지휘권 남용에 대한 계도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 팀장은 “시대가 바뀌면서 군에 들어오는 개인의 성향도 다변화되고 있다. 보직 변경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는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며 “무엇보다 이는 규정 위반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지하고, 나아가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