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작품이야 뮤지컬 형태를 띤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노래가 작품과 인물에 워낙 잘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기도 한 데다 노래 자체도 훌륭해서 계속 돌려 듣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근데 어디 아이만일까, 어른들도 영화나 TV 드라마에 심취하거나 뮤지컬을 보고 온 날은 한동안 작중 노래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riginal Sound Track·OST)은 비단 작품의 구성 요소로써만이 아니라 음악 자체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많은 이들에게 몇 소절, 때로는 첫 한 소절만으로도 작품을 보며 느꼈던 감흥을 되살리게 하는 경험을 주기 때문이겠다.
#일본 캐릭터별 주제가 만들어
1927년 ‘재즈싱어’가 유성영화 시대를 연 이래 영상 매체는 줄곧 음악과 함께해 왔다. 배경음악과 주제가의 힘을 업은 영상은 극이 끝나고도 오랜 시간에 걸쳐 인구에 회자될 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이러한 효과를 부러워만 할 생각은 없었는지, 만화에서도 음악을 섞는 사례들이 있었다. 일찍이 만화의 부가 상품을 여럿 개발해 왔던 일본에서는 이미지 산토라(イメージサントラ, Image Sound Track의 일본식 준말, IST)라는 명칭으로, 애니메이션과는 별개로 만화 작품의 분위기와 캐릭터의 특징을 살린 음악을 제작해 팬들을 끄는 사례가 왕왕 있었다.
2018년경 일본 웹에서 쇼와(昭和) 오타쿠(일본의 연호가 쇼와였던 1926~1989년에 주로 활동했던 오래된 오타쿠들)의 특징이라며 돌아다니던 설문조사 결과 가운데 공동 19위는 “애니메이션화 되지 않은 만화의 이미지 사운드 트랙이 있었다(アニメ化されていない漫画のイメージサントラがあった)”였다. 그만큼 아주 일반적이진 않았으나 만화만으로 일정 이상 인기를 끈 작품들은 캐릭터별로 부여된 주제가들이 제작되어 팬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IST는 만화 잡지에서 부록으로 제공하던 인기 연재작의 드라마CD와 더불어 만화를 입체적으로 즐기게 해 주었다.
이은혜 작가 ‘BLUE’의 음반은 만화 소재로 제작된 최초 시도였다.
한국의 만화 독자들이라고 이런 욕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선구적인 사례로는 이은혜 작가의 인기 만화 ‘BLUE’ 음반이 꼽힌다. OST나 IST라는 표현 대신 ‘연재만화 사운드 트랙’이라는 표현을 썼던 이 음반은 만화 소재로 제작된 최초 시도였다. 이정봉, 이세준(유리상자), 최재훈 등 1990년대 후반을 대표하던 가수들이 참여하고 이은혜 작가가 곡 전부의 작사와 음반의 책임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2집까지 등장해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이 음반은 지금 구할 수 없지만 음반에 참여했던 몇몇 가수들의 음반에 ‘비애천사’(유리상자)나 ‘달의 눈물’(최재훈) 같은 곡들이 수록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웹툰의 BGM과 OST
밴드 델리스파이스가 ‘고백’이란 곡을 일본 만화가 아다치 미츠루의 ‘H2’를 모티브로 삼아 만들기도 하고, 꼬마비 작가는 작품 연재 중 본인의 작품 분위기에 맞는 다른 영화 등의 음악을 작가의 말에 소개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BGM(BackGround Music, 배경음악)으로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웹툰 작품 자체에 음악이 탑재되기 시작한 건 호랑 작가부터다. 움직임과 음향을 적절히 집어넣은 ‘옥수역 귀신’을 만들어 시청각 효과를 준 웹툰의 원조 격으로 불리는 호랑 작가는 그에 앞서 밴드를 소재로 한 2010년작 ‘구름의 노래’에 BGM을 삽입했다.
조은선율 작곡가는 독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던 곡을 묶어 2012년 ‘조은선율 웹툰OST’라는 제목으로 디지털 음원을 출시했다.
작곡가 조은선율의 활동도 두드러진다. 조은선율 작곡가는 2011년 1월 하일권 작가의 ‘안나라 수마나라’를 시작으로 송래현 작가의 ‘리턴’, 권혁주 작가의 ‘그린 스마일’, 정필원 작가의 ‘지상 최악의 소년’, 하일권 작가의 ‘목욕의 신’, 캐러멜 작가의 ‘다이어터’ 등 인기작 아홉 작품의 음악을 만들었다. 조은선율 작곡가는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던 곡들을 묶어 2012년 ‘조은선율 웹툰OST’라는 제목으로 디지털 음원을 출시했는데, ‘만화니까 어때야해’라는 강박 없이 작품 이미지를 잘 반영해 품질에 정성을 들인 곡이었다. 이 가운데 ‘목욕의 신’의 경우는 조은선율 작곡가와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윤건 씨가 만든 20여 곡을 별도의 OST를 출시하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도 했다.
음악을 담거나 OST 형태로 묶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작품들은 점차 더 늘어났다. 주호민 작가가 초기작 ‘무한동력’을 2013년 재연재하면서 마지막회에 친구가 보내온 음악에 직접 가사를 쓴 곡을 붙이는가 하면, 시니/혀노 작가의 ‘죽음에 관하여’에는 작곡가가 꿈이라는 고교생 독자가 만화를 먼저 보고 작업해 보내온 곡을 배경음악으로 쓰기도 했다. 기안84의 ‘패션왕’에도 작품 분위기에 맞는 전자음악이 깔렸다. 류채린 작가의 ‘우리, 헤어졌어요’, 순끼의 ‘치즈 인 더 트랩’, 석우의 ‘오렌지 마멀레이드’, 이종범 작가의 ‘닥터 프로스트’ 등에도 음악과 노래가 쓰여 분위기를 돋우기도 했다. BGM이 달린 회차에는 독자들의 반응이 한층 더 뜨겁다.
#다양한 시도 본격화되기를
2020년 현재 음원 사이트에서 웹툰 음원을 검색하면 200개가 넘는 곡이 나온다. 인기가 좀 있는 만화다 싶으면 IST도 만들곤 했던 일본을 부러워하던 옛 기억은 이제 추억이다. 웹툰에 질 세라 ‘달빛조각사’와 같은 웹소설도 음원을 출시하고 있다. 웹툰과 웹소설, 영상을 한데 묶는 전략이 가속화할수록 더 많은 들려줄 거리가 필요해질 것이기에, 웹툰과 음악의 만남은 이후로도 계속될 듯하다.
음원 사이트에서 웹툰 음원을 검색하면 200개가 넘는 곡이 나온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들 음악이 여전히 작품의 팬들을 만족시키는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흥행 요소가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만화가가 직접 주도하거나 적극적이지 않으면 무언가 부가가 나오기 어려운 만화 자체의 한계점도 있다. 음원 사이트에 오르지 않은 경우는 더욱이 차트에서 잡히지 않는다. 트로트 아이돌의 출연을 일찌감치 예견(?)한 김명미 작가의 ‘뽕짝스타’는 작중 ‘동방예의지국’이 부른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의 음원을 무료 배포하고 뮤직비디오를 2013년 유튜브에 올리고 잡지 공식 계정에서 열심히 홍보했지만 현실적으로 음악을 듣는 이들의 주 이용 행태는 이미 음원 사이트로 옮겨 간 지 오래다.
모든 경우의 수에 다 대응할 수야 없지만, 웹툰이, 그리고 만화가 보여줘야 할 것을 늘려가야 함이 분명한 상황이라면 이를 좀 더 부각시킬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주요 웹툰 연재 공간에서부터라도 작중 음악을 쓴 사례와 OST가 발매된 경우를 묶어서 별도 페이지를 만드는 정도는 해 주면 좋겠다.
만화칼럼니스트 iam@seochanhw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