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재판 단계에 가면 디지털 성범죄 형량이 한없이 낮아질까. 일각에서는 ‘디지털’ 영역에서의 범죄를 ‘현실’ 영역보다 약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접근 아래, 관대하게 처벌해 온 것이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징역 5년 이상으로 법정 형 기준은 높지만, 실제는 징역 1년도 엄한 처벌이다.
#처벌 수위 10년 전 수준
2012년 초 조 아무개 씨는 아동·청소년 음란물을 성인 PC방 150여 곳에 제공한 혐의로 기소됐다. 성인 PC방을 공동 운영한 서 아무개 씨와 전 아무개 씨도 아동·청소년 음란물 160여 편 등 6만 7000편의 동영상을 이용자들에게 시간당 5000원을 받고 제공한 혐의로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포토라인에 서자 시민들이 강력처벌을 촉구하며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법원의 처벌은 경미했다. 조 씨만 징역 1년의 실형이 선고됐고, 전 씨와 서 씨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심지어 조 씨의 경우 동종 범죄로 기소유예라는 선처를 한 차례 받았고, 수사 과정에서 도주를 했음에도 징역 1년에 그쳤다.
8년이 지난 요즘의 ‘n번방’ 사건 역시 아동·청소년 음란물 범죄를 아우르는 디지털 성범죄 양형 기준이 없다보니 터진 문제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성범죄 전담 재판부를 역임한 한 판사는 “최근 몇 년 사이 강간에 대해서는 인격 살인이라는 판단과 함께 양형 기준이 강화됐다”면서도 “그동안 온라인 영역에서의 성범죄는 ‘불법 촬영’이나 ‘유포’가 주로 기소되는 내용들이었는데 성폭행 범죄보다는 약하게 처벌해야 하지 않겠냐는 판단이 오랫동안 법원 분위기에 영향을 준 감이 있다”고 털어놨다.
디지털 성범죄가 갖고 있는 유사점들이 낮은 처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보통 온라인을 통한 음란물 유포는 젊은 남성이 피고인이고, 아동·청소년이 피해자인 경우가 많은데 사건 흐름이 대부분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지적이다. 판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젊은 남성의 경우 앞으로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가정이 있는 경우 가족들이 처벌불원 탄원서를 써서 내곤 한다”며 “여기에 피해자와 합의를 했다고 하면 집행유예 정도를 받는 게 고정화 된 처벌 기준이었는데 피해자가 어리거나 미성년일 경우 부모들이 합의를 대신하는 경우도 문제일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살인, 뇌물, 성범죄, 횡령·배임, 절도, 선거 등 20개 주요 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은 설정돼 있다. 하지만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제작·배포·소지한 범죄(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11조 위반)에 대한 양형 기준은 아직 없다. 그 사이 고착화된 ‘솜방망이’ 처벌들이 자연스레 암묵적 기준이 돼 법관들에게 “디지털 성범죄로 징역 3년이면 중형”이라는 인식을 만들어 냈다는 얘기다.
#판사들도 “문제 많은 기준 손보자” 부글부글
자연스레 판사들도 ‘이번 기회에 손보자’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연구모임인 ‘젠더법연구회’ 소속 회원 등 판사 13명은 3월 25일 법원 내부 통신망인 ‘코트넷’에 “아동·청소년에 대해 카카오톡 오픈방이나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접근해 신체 부위 등을 촬영해서 전송하도록 한 뒤 이를 유포하는 등의 범죄는 다른 디지털 성범죄와 본질적으로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온라인 영역에서 이뤄진 범죄를 ‘간접적인’ 성폭력으로 봤다면, 이제는 중대한 범죄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법원 양형위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의 제작·배포 등)에 대한 양형 기준을 만들기 위해, 판사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대법 양형위는 ‘14세 여자아이를 상대로 한 성착취 영상의 제작, 판매, 배포 등 범죄에 대한 적절한 양형’에 대해 제작의 경우 “2년 6개월에서 9년 이상”, 영리 목적 판매와 배포의 경우 “4개월에서 3년 이상”을 각각 보기로 제시했다. 그러나 앞선 판사들은 이 기준 자체도 너무 낮다는 주장이다.
“이번 기회에 시민 눈높이를 고려한 기준을 만들자”는 얘기가 법원 안에서도 힘을 받고 있다. 하지만 판사들은 입을 모아 “살인과 강간, 그리고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처벌 기준 구분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서울중앙지법은 3월 30일 n번방 사건 관련 피고인 형사재판을 맡고 있던 오덕식 부장판사를 교체했다.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오 판사를 교체해달라는 청원이 40만 명을 돌파하자 오 부장판사가 재배당을 요청했다. 사진=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 캡처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최근 사건들이 터지면서 양형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자꾸 살인보다 양형이 높은 범죄들이 등장하는 것이 ‘과연 옳기만 한가’라는 생각이 든다”며 “여론에 휩쓸리기보다 법원이 주도적으로 이를 검토할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재판부 변경이 이뤄진 것에 대해서도 우려 섞인 반응이 나온다. 서울중앙지법은 3월 30일 “국민청원 사건과 관련해 담당 재판부가 해당 사건을 처리하는 데 현저히 곤란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된다”며 n번방 사건 관련 피고인 형사재판을 맡고 있던 오덕식 부장판사를 교체했다.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오 판사를 교체해달라는 청원이 40만 명을 돌파하자 오 부장판사가 재배당을 요청한 것이다.
오 부장판사는 결국 텔레그램에서 성착취 범죄를 저질러 온 ‘태평양’ 이 아무개 군(16세)의 재판에서 빠졌다. 오 부장판사는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한 혐의로 기소된 고 구하라의 전 연인 최종범 씨의 재판에서 집행유예(징역 1년 6월)를 선고한 바 있다.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판사를 탄핵하자”는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한 판사는 “오 부장판사가 얼마나 압박을 느꼈으면 재배당을 요청했겠냐”면서도 “국민들의 분노도 이해하지만, 재판은 법리와 증거로 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새롭게 사건을 맡은 판사도 여론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이런 분위기가 양형을 주도한다면 그것도 문제”라고 토로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