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대통령을 죽이겠다고 온 무장공비가 서울 거리를 휘젓고 북한군이 얼어붙은 임진강 위로 탱크를 몰고 내려올 것이라는 공포가 우리들을 얼어붙게 했다. 그런 속에서도 선생님은 꿈을 심어주었다. 앞으로 마이카시대가 올 거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잘살아 보세’라는 깃발을 들고 모세같이 국민들을 이끌었다. 광부와 간호사가 독일로 가서 노동을 팔고 군인들이 월남에 가서 피를 팔았다. 간호사로 간 친척 이모는 병자들의 똥을 닦아주다가 얻어맞고 병자가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엄상익 변호사
턱없이 교만한 한국인들이 생겼다. 돈을 벌면 인간 품질이 상승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소련이 무너진 후 얼마 안 되어 시베리아를 철도로 횡단할 때였다. 빛바랜 머플러에 낡은 코트를 입고 상점 앞에 줄지어 있는 러시아 여성들은 가난하고 불쌍해 보였다. 시골의 자그마한 박물관 입구를 지키던 한 러시아 여자로부터 우연히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는 한 달에 백 불 정도 가지고 생활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암시장에 나가면 문학 서적들이 산같이 쌓여 있어요. 문화 공연도 거의 돈을 안 내고 얼마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 달러를 얼마나 가졌느냐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러시아는 가난해도 뿌리 깊은 문화가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나의 가슴에 강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다가 카프리섬의 선착장에서 한 이탈리아인으로부터 비아냥거림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을 보면 주머니는 꽉 차 있는데 머릿속은 뭐가 들어 있는지 잘 모르겠어.”
시큰둥하게 내뱉었지만 의미를 던져주는 말이었다. 일본의 작가 야마자키 도요코는 경제번영과 함께 양심을 잃어가는 일본의 정신적 불모를 주제로 ‘불모지대’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잘살아보자고 했는데 정신적 빈곤은 아직도 그대로인 것 같다. 광장에서 생긴 기독당은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은 것일까. 예수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국가도 경제만으로 존재하는 건 아닐 것이다. 종종 정치인들을 만나면 “당신은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까”라고 물어본다. 그들의 정치철학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연다고 했다. 신선한 구호였다. 그러나 그는 보통사람이 아닌 귀족 같았다. 그가 주장하는 구호는 숙성되지 않은 공허한 관념 같은 느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가난과 차별의 경험 속에서 숙성된 정치철학이라고 공감했다. 그러나 그는 기득권층의 두꺼운 벽을 깨지 못하고 자신이 부서져 버렸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나오는 연설문에서는 피부에 와 닿는 간절한 염원을 느끼지 못했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문재인 변호사와 둘이서만 봤을 때 “당신은 어떤 나라를 만들어 보고 싶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기독교당의 이념적 지향은 무엇일까. 예수는 정치세력을 조직해 당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가난한 자들을 모아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다. 강대국 로마에 대해 유대의 주체성과 독립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개인의 영혼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했다.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모임은 그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정신적 불모지대에 불과하다. 사회가 개량되고 국가가 성숙하려면 먼저 개개인의 영혼이 변화되는 게 맞다. 기독교당이 정치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소금 같은 그 본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