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시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는 투표소 모습. 사진=박정훈 기자
중도층은 여론조사 기관이 실시하는 지지도 여론조사 항목에서 무당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비율은 여론조사 기관마다 차이를 보인다. 본격적인 총선 국면으로 돌입한 2월 1주차부터 4월 1주차까지의 정당 지지도 조사를 살펴보면 한국갤럽 23~33%, 리얼미터는 7~12% 사이에 무당층이 형성돼있다.
전국 각지에서 오차 범위 접전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무당층 선택에 따라 선거 결과가 좌우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선거가 임박했음에도 지지할 곳을 찾지 못하고 무당층이 두 자릿수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정치권의 부적절한 행태가 주요 원인이라고 꼬집는다.
일단 거대 양당의 비례대표용 위성정당 설립이 중도층에 실망감을 줬다는 지적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4+1 협의체 공조를 통해 공직선거법을 개정,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
이에 반발해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은 선거법 통과 직후부터 비례정당 창당을 언급했고, 실제 미래한국당을 설립했다. 반면 민주당은 ‘다양한 정책과 이념에 기반한 군소정당의 의회 진출을 촉진한다’는 법 개정 취지에 어긋난다며 비례정당 설립 가능성을 일축했다.
하지만 1당을 뺏길 수 있다는 현실적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민주당도 비례연합정당 설립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더불어시민당은 사실상 민주당의 비례전용 정당으로 통한다. 손혜원 무소속 의원과 정봉주 전 의원이 주도해 만든 열린민주당 역시 범민주당 계열로 분류된다. 이처럼 정치개혁 일환으로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시킨 비례정당 출범에 대해 중도층 여론은 차갑기만 하다.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들어가면서 후보들의 선을 넘는 발언들도 중도층 표심을 흔들고 있다. 우선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의 잇따른 설화가 중심에 섰다. 황 대표는 2월 9일 모교인 성균관대를 찾아 인근 음식점 주인과 대화하던 도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1980년, 그때 하여튼 무슨 사태”라고 표현해 역사의식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이어 코로나19 정국에서 예배 강행을 둘러싸고 정부와 개신교 측이 갈등을 빚자 3월 28일 자신의 SNS에 “교회 내 코로나19 감염 사실이 거의 없다”고 주장해 부적절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최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텔레그램 성착취(일명 n번방) 사건과 관련해서도 황교안 대표는 “호기심으로 방에 들어왔다 그만둔 사람에 대해서는 판단이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가 비판을 받자 “법리적 차원에서 처벌의 양형은 다양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일반론을 말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공식 선거운동 첫 날인 4월 2일에도 황 대표는 비례대표 투표용지에 대해 “키 작은 사람은 자기 손으로 들지도 못 한다”고 말해, 신체 비하 지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통합당의 공식 유튜브채널인 ‘오른소리’의 방송 ‘희망을 여는 뉴스쇼 미래’에선 3월 31일 진행자 박창훈 씨가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임기 끝나고 나면 교도소에서 친환경 무상급식을 먹이면 된다”고 발언해 거센 비판을 받았다.
홍영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총선이 다가오면서 설문조사에 진보라는 응답은 줄고, 보수는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통합당의 지지율은 크게 오르지 않고 있다”며 “이는 황교안 대표의 연이은 실언에 일부 책임이 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민주당도 설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홍익표 전 수석대변인은 2월 25일 대구·경북 봉쇄 조치 발언을 했다가 뭇매를 맞고 대변인직을 사퇴했다.
이해찬 대표는 1월 15일 민주당 공식 유튜브 채널 ‘씀TV’ 인터뷰에서 “나도 몰랐는데 선천적인 장애인은 (후천적인 장애인보다) 의지가 좀 약하대요. 어려서부터 장애를 갖고 나오니까”라고 말해 장애인 비하 논란에 휩싸였다.
21대 총선 선거운동이 시작된 4월 2일 서울 종로에 출마한 미래통합당 황교안 후보가 종로구 통인시장 후문에서 거리유세를 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정치인들 막말은 선거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곤 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당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60·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고 말해 역풍을 맞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2012년 19대 총선 때는 민주통합당(민주당 전신) 김용민 후보가 과거 인터넷 라디오에서 “유영철을 풀어 라이스(전 미 국무장관)를 XX해 죽이는 거예요” 등의 막말을 한 게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선 자유한국당의 정태옥 의원이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가서 살고, 망하면 인천 가서 산다)’는 발언을 해 수도권 표심이 요동친 바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말 한마디 잘 못하면 표 떨어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선거 유세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입 조심할 때”라고 말했다. 통합당 재선 의원도 “아직 누구를 뽑을지 정하지 않은 중도층에겐 말실수 하나가 크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접전지역에선 그야말로 치명타”라고 했다.
이처럼 비례대표용 위성정당 난립과 거대 양당의 극한 대결 속에 도를 넘는 발언으로 무당층의 정치 불신이 커져 투표율이 낮아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친박계로 분류되는 통합당의 수도권 한 후보는 “이번 총선에서 무당층은 투표소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높다”며 “그럼 각 정당의 지지층 투표율이 중요하다. 전통적 지지층을 결집시켜 투표장에 나오게 하기 위해 지도부에서 자극적 표현을 쓰는 선거운동을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무당층의 투표율이 높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론적으로 선거에서 투표율이 높아지는 경우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효능감이 커질 때나 분노 지수가 높아질 때”라며 “이번 총선은 분노가 투표 참여 동기가 된 모양새”라고 분석했다. 정치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오히려 투표율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