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아 두는 것: 268.2×130.3cm 장지에 혼합재료 2019
신화는 상상력의 공간에 지은 집이다. 그곳에 깃들어 살고 싶게 이끄는 것이 예술이다. 사람들이 모여 들어 동네를 이루면 문명이 된다.
인류가 번성한 곳에는 풍부한 상상력을 재료로 삼은 튼실한 구조의 신화가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화가 있다. 고구려 신화는 우리 상상력의 넓이와 깊이를 가늠케 했으며 표현에서도 얼마나 기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를 집약해 보여주는 유산이 고구려 고분 벽화다. 이를 보면 우리 선조의 공간관이 얼마나 조형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자연 공간을 함축해 하나의 도상으로 표현해 거대한 자연을 간략하고도 명쾌한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자연을 상상력으로 버무려 새로운 공간으로 만드는 지혜는 시간을 새롭게 해석했던 우주관에서 비롯됐다. 우리 선조들은 세상 모든 일이 날줄과 씨줄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유일하다고 믿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다른 세상이 있다고 생각했다. 서양인들이 바라본 세상처럼 창조되고 종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생이 거듭되는 윤회를 믿게 된 것도 그래서다.
시간이 흐를 때: 22.0×27.3cm 장지에 채색 2017
시간도 일직선으로 흐른다는 생각보다는 전후좌우 사방팔방으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내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물이 서로 주고받는 작은 힘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즉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있어서 가능한 게 아니고 자연의 모든 것이 연결된 결과의 한순간이며, 여기서 일어나는 일도 그런 연결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런 우주관은 독특한 공간 개념을 만들어냈다. 자신이 속한 공간 속의 모든 자연과 기물이 하나의 시점에서 보이는 게 아니고 동등하고 다양한 시점에서 공존한다는 생각이다. 중국에서 비롯됐지만 우리 전통 회화에서 독특한 다시점 화법으로 자리 잡은 공간 개념이었다.
이런 다시점 화법은 평원시(보통 사람 눈높이로 바라보는 시점), 고원시(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점), 심원시(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점)로 발전해 전통 산수화의 개성적인 공간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간 구성 방식은 조선 말 민화에서 강한 표현성을 보여주면서 현대적 감성과도 소통한다.
기억과 바램: 72.7×60.6cm 장지에 혼합재료 2018
젊은 작가 엄소완이 추구하는 세계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우리 선조들이 그려놓은 고지도를 보는 느낌이다. 자연에서 보이는 나무나 숲, 강과 길이 화면 중앙에서 바라보는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전후좌우가 없이 추상적 구성방식으로 엮어 평면화 돼 있다. 그런데 개별 사물들은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각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주인공이 없는 동등한 관심 속에서 공존하는 세계다.
이를 통해 그는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자신의 세대는 개별적 세계를 갖고 있으면서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서 공존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데, 그걸 풍경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전준엽 화가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